[칼럼] 5, 6공 시절로 돌아가려는가?(한겨레신문 2008.3.19)
김유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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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3.21 12:00
“정말 눈물만 납니다. 도대체 우리가 무얼 잘못했기에, 차디찬 길바닥에서 천막생활을 하고 강제철거까지 당해야 하는 건가요? 정말 비정규직에게는 희망이 없는 건가요? 노동부와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법원의 가처분 판결 모두, 우리의 주장이 옳다고 합니다. 하지만 회사는 법대로 하겠답니다. 그러면 우리 힘없는 비정규직들은 대법원 판결이 날 때까지 적어도 3년을 기다려야 합니다. 정부와 경찰, 검찰은 지난 십여년 온갖 불법을 저질러 온 회사 쪽에는 아무런 제재를 가하지 않으면서, 사회적 약자인 비정규직들만 위협하고 있습니다. … 가진 것이라곤 몸뚱이 하나밖에 없는 우리는, 지난 120일 동안 온몸으로 억울한 사정을 호소해 왔습니다. 덕분에 생전 겪어 보지 못한 유치장도 경험하고, 무자비한 공권력과 용역 깡패에게 얻어맞아 온몸이 상처투성이가 되고, 가슴속에는 억울하다는 생각과 분노만 쌓여 가고 있습니다.”
이 글은 올해 초 대통령직 인수위 홈페이지의 정책 제안방에 실린 ‘비정규직이 그렇게 세상에 큰 죄를 지었는지-코스콤 노동자는 억울합니다’란 글의 일부다. 게재 20여일 만에 조회 건수가 9천건이 넘었고, 댓글 330여건이 달리는 등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렇지만 “국민을 잘 섬기겠습니다. 국민에게 희망을 드리겠습니다”를 표어로 내건 인수위가, 이러한 호소를 받아들여 문제 해결 방안을 마련했다는 소식은 끝내 들리지 않았다. 비정규직 노동자도 분명 이 나라 국민인데 말이다.
이명박 정부가 출범한 지 보름 만인 지난 11일, 코스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천막농성장은 공권력에 의해 강제 철거됐다. 온갖 폭력과 욕설이 어지럽게 춤췄다. 1천여명의 경찰력과 200여명의 용역업체 직원들은 농성장을 지키던 노동자들을 짐짝처럼 끌어냈다. 이 가운데 6명이 중상을 입고 병원에 실려 갔다. 공권력 투입과 구사대 폭력으로 얼룩진 과거 5, 6공 시절 노동현장의 모습이, 2008년 춘삼월 서울 한복판 여의도에서 다시 용트림한 것이다.
이틀 뒤인 13일 노동부 업무보고에서 이명박 대통령은 “정치적·이념적 목적을 갖고 파업하는 일은 국민들이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이념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노동운동을 하던 시대는 이미 지났다”고 말했다. 이날 노동부는 국정과제 실천계획 첫머리에 “노조의 임금인상 자제와 무파업 표명 등 노사협력선언 확산, 노조의 폭력·파괴·점거 등 불법행동에 대한 엄정한 법집행” 등 과거 5, 6공 시절의 낡은 레코드판을 틀었다.
다시 이틀 뒤인 15일 경찰청 업무보고에서 이명박 대통령은 “외국 텔레비전에 쇠파이프를 휘두르는 한국의 불법폭력 시위 모습이 비치면 국가적 브랜드 가치가 떨어지고 경제활동에도 영향을 준다”고 말했다. 이날 경찰청은 악명 높았던 ‘백골단’과 같은 “체포전담반 운용, 가벼운 공무집행 방해 사범도 무관용 원칙 적용” 등 강경일변도의 법질서 확립 방침을 밝혔다.
하지만 과거 5, 6공 시절에도 실효성을 못 보고 더 커다란 저항과 갈등만 불러일으키던, 공포와 폭력을 동원한 억압적 노동통제 방식이 과연 ‘선진화’를 얘기하는 2008년 오늘날, 노사 갈등을 해소하고 노사 관계를 개선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인지는 자못 회의적이다. 최근 노사 갈등은 대부분 비정규직 문제에서 비롯되고 있다. 따라서 노동자들의 고용 불안과 생활 불안을 해소하는 방향에서 사회 통합적 노동정책을 실시하지 않는다면 백약이 무효가 될 것이다.
문제의 원인과 동떨어진 대증요법으로는 결코 노사 갈등을 해소할 수 없다. 코스콤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반년 넘게 파업하고 농성한 것도 회사 쪽의 불법 파견에서 비롯된 것이지 정치적·이념적 목적 때문은 아니잖은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봐야 해결책이 나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