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소의 창] 더 나은 논의를 위해 버려야 할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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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소의 창] 더 나은 논의를 위해 버려야 할 것들

윤자호 299 10.11 09:00

[연구소의 창] 더 나은 논의를 위해 버려야 할 것



작성: 윤자호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연구위원



일상생활을 소화하기 위해서 많이 노력을 하고 있다. 그 중 첫 번째가 ‘언론보도 보고 감정 조절하기’다. 첫 번째라는 것은 가장 많이 시도하지만 잘 안 된다는 의미다. 언론에서 선택하는 단어와 논조 그 자체에 분노할 때도, 사건 자체의 참담함에 슬퍼하고 분노할 때도, 또 양자 모두를 느낄 때도 많다. 덧붙이자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기뻤던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신당역 스토킹 살인 사건 보도를 접하고, ‘언론 보도 보고 감정 조절하기’는 완전히 실패했다. 한 여성 노동자가 일터에서 자신의 일을 하다가 사망했다. 같은 직장에 다니던 가해자는 피해자로부터 불법촬영과 스토킹 혐의로 고발·고소당한 후 재판 선고일 직전에 계획적으로 피해자를 살해했다.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도주 및 증거인멸의 위험이 없어” 구속되지 않아 가능한 일이었다. 또한, 가해자는 직위해제 중이었음에도 서울교통공사의 내부망을 이용해 피해자의 정보를 파악했다.​1)


세상에는 갑작스럽게 그냥 발생하는 일도 있지만,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사건은 여러 제도와 구조가 층층이 겹쳐 오른 결과다. 신당역 스토킹 살인 사건 기저에는 서울교통공사의 안이한 인사관행과 책임 회피, 2016년 구의역 노동자 사망 이후 수용되지 않은 2인 1조 근무체계, 공공영역에서조차 방기되고 있는 노동자의 안전, 성범죄에 있어서 유난히 헐거운 한국 사법 체계와 결정, 우리 사회에 만연한 젠더 기반 폭력​2)​ 등이 존재한다. 


9월 14일 사건 이후 공공운수노조 서울교통공사노동조합 책읽는여성노동자모임에서는 사건의 책임은 공사에 있음을 지적하며 성명문을 냈다. 이어 노조는 신당역 희생자 추모주간 운영을 결정하고, △장례 등 유족 지원 대책 마련 △승객 접점 부서 안전확보 대책 수립 △노사 공동 조직문화 개선 대책 수립 등의 내용을 담은 특별교섭을 추진할 것임을 밝혔다. 


22일 여성·시민노동단체는 추모의 의미를 담아 검은 옷을 입고 “어디도 안전하지 않았다. 우리는 끝까지 싸울 것이다”고 외치며 행진 집회를 개최했다. 집회에는 많은 시민들이 함께했으며, 신당역에 마련된 추모 공간에도 시민들의 발걸음이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목소리와 움직임에는 사람으로서 응당 가져야 하는 연민과 공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명시적으로 표현하든 그렇지 않든, 마냥 남의 일이 아님을, 누구든 겪을 수 있는 구조적 문제라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진단 이후에는 응당 대책 마련과 실행이 따른다. 하지만 시민사회와 노조가 보여주고 있는 모습에 비해, 서울교통공사와 정부 부처가 보이는 모습은 투미하다. 9월 16일 김현숙 여성가족부 장관은 신당역 살인사건 현장을 방문해 “여성혐오 범죄라는 의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그렇게 보지 않는다”고 하며 “여성과 남성이라는 이중 프레임으로 보는 것에 대해서 동의하지 않는다.”고 했다. “구조적 성차별은 없다.”는 현 정부의 선언과 잘 부합한다. 


“구조적 문제가 아니다”는 “아무런 제도적(구조적) 개선을 원하지 않는다”는 선언과 같다. 그런 의미에서 이후 서울교통공사 김상범 사장이 제시한 재발 방지 방안은 김현숙 장관의 진단과 맥을 함께 한다. “여성 역무원의 당직을 줄이고 역사 안 모든 업무에 현장 순찰이 아닌 CCTV를 통해 문제가 있으면 현장에 나가 보는 방향으로 순찰 시스템을 바꾸겠다”고 한 것이다. 시민의 안전과 지하철 노동자의 안전 문제를 방기하거나 악화시킬 뿐 아니라, 여성 노동자를 일터의 한 영역에서 배제하려는 기막힌 대책이다. 


"남녀의 문제를 떠나서"의 속뜻은 "그 무엇보다 남녀의 문제"라는 시쳇말이 있다. 언론을 포함한 제도권에서는 신당역 스토킹 살인사건이 여성혐오인지, 아닌지 혹은 남녀문제인지 아닌지 갑론을박 하는 것과 같은 소모전을 그만해야 한다. 젠더 기반 폭력이 명백하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여성 역무원 당직 줄이기, 현장 순찰 아닌 CCTV’ 같은 엉뚱한 방안을 이야기하며 시간을 보냄으로써 현실을 더 엄혹하게 만들 뿐이다. 


당연한 전제를 논쟁거리로 만듦으로써 제도적 개선 방안 마련의 동력을 저하하는 일련의 행위들을 중단하고, 경계해야 한다. 만약 당연한 전제를 논쟁거리로 만들려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과감하게 논의 과정에서 배제할 필요도 있다. 구조적 성차별은 있다. 그것은 우리 사회의 다른 구조적 문제와 촘촘하게 얽혀있으며, 많은 경우 명쾌하게 분리할 수 없다. 따라서 ‘어떤 문제’가 있고 ‘어떤 대안’이 가능한지 치열하게 논의하고 제도적인 노력을 기울인다면 재발을 방지할 수 있다. 우리가 힘을 쏟아야 할 곳은 바로 이 지점이다. 


1언론에 따르면 지난 5년 서울교통공사 직위해제자 20명 중 11명이 내부망에 접속했다(노컷뉴스, “전주환에게 이용된 '내부망'…서울교통공사 직위해제자 11명 접속”, 22.09.28.).
2) 1993년 UN 「여성에 대한 폭력철폐선언」에서 처음으로 사용한 용어로, 신체적·성적·심리적 해악이나 고통을 주거나 줄 수 있는, 성별에 기초한(gender-based) 공적·사적영역에서의 폭력 행위를 뜻한다. 이 폭력 행위에는 그러한 행위를 하겠다는 협박·강제·자유의 임의적 박탈 역시 포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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