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다 풍요로운 노동보건 정책 수립을 위한 제언

노동사회

보다 풍요로운 노동보건 정책 수립을 위한 제언

편집국 0 2,893 2013.05.13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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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4년 11월호부터 연재된 ‘노동과 건강’은 노동자건강권 운동의 새로운 모색을 위해 노동건강연대와 노동사회가 함께 만들어 가는 자리입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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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노동보건정책의 공식 역사는 1953년 제1공화국 시절 부산에 피난을 간 상태에서 제정한 근로기준법으로부터 비롯된다. 일제시대에 양성된 의사들 중 일부가 흥남질소비료공장을 비롯한 대기업에서 활동했다는 이야기나 미군정 하에서 여성과 노약자들을 위한 기준의 제정 등에 관한 언급이 기록으로 남아 있긴 하지만, 이들은 지금의 노동보건정책에서 보면 전혀 그 의미가 단절된 과거의 일일 뿐이다.

노동자 건강의 목적은 ‘경제발전 비용 최소화’?

사실 실질적인 활동의 측면에서 보자면,  한국의 노동보건정책은 그 시행령도 제대로 마련하지 못하였던 1953년의 근로기준법으로부터 비롯되었다기보다는 1963년 산재보상보험법과 함께 노동청이 신설되고 본격적인 산재보상정책이 실시된 이후라고 하는 게 더 정확할 것이다. 이런 한국노동보건정책의 맥은 당시 군사정권 하에서 함께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던 경제개발계획의 일환으로서만 기능했다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다. 즉 한국노동보건정책의 목적은 경제개발에 따르는 부작용 혹은 그에 따르는 사회소요의 최소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특히 한국의 노동보건정책은 1980년대 말 민주화운동 이후 여러 직업병의 발견을 둘러싼 사회적 파장이 커지기 전까지는 단지 제도화된 산업재해만을 관리하는 기능에 머물렀다. 이러한 규격화된 제도는 즉각적으로 인과관계가 인식될 수 있거나 기계화된 집단검진을 통하여 손쉽게 발견될 수 있는 사고와 질병만을 다루는 것이었다. 이는 경제발전이라는 주목적에 부합하는 선에서 관리되어야 하는 사고와 질병의 범위를 최소한으로 즉, 경제발전의 측면에서 보았을 때 가장 효율성이 높도록 축소시킨 결과였다.

결국 이러한 범주에 잡히지 않는 사고와 질병의 문제가 1987년 민주화운동과 맞물려 우리 사회에서 점차 불거졌다. 그 결과 노동부 내에 산업안전국이 설치되고 곧이어 산업안전보건법의 전면개정을 실시하게 되는 단계에 이르렀다. 이러한 변화 역시 ‘노동보건정책이 경제발전이라는 주목적에 부합하는 한에서 사고와 질병을 관리한다’는 틀을 벗어 던지지 못한다. 단지 기존의 틀, 특히 집단관리 방식을 통하여 단순한 기술적 수단을 집행하는 기존의 건강검진제도와 작업환경측정제도를 일부 확장하는 것에 그치는 변화였다. 환경부의 환경보건과는 달리 노동부의 노동보건은 소극적인 것이었고, 사회적 문제가 불거진 이후에야 대처하는 방식에 머물러 있었다.

현재 노동보건정책의 드넓은 사각지대

노동보건정책 은 1990년대 이후 비교적 이전의 산업보건정책의 틀을 벗어나려고 애를 쓰고 있다. 특히 산재보험법과 산업안전보건법의 적용대상을 기존 제조업의 경우 1인 이상 사업장으로 확대하였고 산업안전보건법에서 기존의 물리화학적 유해인자 외에 사회심리적 유해인자 혹은 작업관리상의 인간공학적 유해인자들을 포함한 관리를 지향하고 있다는 점 등은 변화에 대한 필요성을 어느 정도 수용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산업안전국’이라고 하는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아직까지 산업보건정책은 제조업, 대기업 위주로 기술적 유해요인만을 대상으로 집단적인 관리체계를 통하여 관리하는 방식이다.

사실 노동보건정책은 전체 산업, 특히 가장 심각한 문제를 가지고 있는 영세사업장을 주요 관리대상으로 해야 한다. 특히 기술적 유해요인만이 아니라 영세사업장에 물리화학적 유해인자들이 집중되도록 하는 사회문화적 그리고 제도적 요인들을 포함하여야 한다. 그리고 문제를 안고 있는 개개인이 개별적으로 직접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관리체계를 만들어 나가야만 한다.

이런 원칙에서 볼 때, 현재의 노동보건정책은 다음과 같은 사각지대들을 가지고 있다. 첫째, 그 관리대상에 있어 농업, 서비스업처럼 많은 유해요인을 안고 있으면서도 기존의 전통적인 사업주와 노동자의 고용관계에서 벗어난 산업 분야와 영역들이 전혀 관리되지 못하고 있다. 둘째, 다른 산업 분야를 차치하더라도 전통적인 제조업 분야에서조차 외국인 노동자, 여성 및 장애자를 포함한 소수 노동자, 영세 사업장 노동자와 같이 취약집단에 대한 관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현재 노동부에서 취하고 있는 태도는 이들 노동자의 안전보건이 취약하게 되는 배경과 원인을 파악하고, 그에 따른 사전적·원인적 관리를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드러난 결과 그 자체에 대해서만 사후적·결과적 대응에 그치고 있는 실정이다.

셋째, 감성노동, 불규칙노동 등과 같이 기존의 물리화학적 유해인자 평가 방식으로 측정되지 못하는 노동보건의 문제점들이 관리 대상에서 제외되어 있다. 최근 언론에 보도된 KT 사측의 탄압으로 인해 정신질환이 발생한 KT 상업판매팀 노동자들의 사례는 이러한 사각의 위험성을 잘 드러내주고 있다. 넷째, 문제해결 방법에 있어서도 기존의 고용관계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일정 규모 이상의 사업장을 중심으로 한 집단적 관리 방식을 탈피하지 못하고 있다. 그 결과 집단의 이익과 이해를 둘러싼 역학관계 때문에 관계되지 않는 문제는 여전히 사각지대로 남을 수밖에 없으며, 특성과 조건에 따라 개별적 접근 방법이 요구되는 문제에 대해서는 조직적인 해결책이 전혀 없는 실정이다.

개별기업과 사회, 누가 더 ‘효율’적일 수 있는가

현 재 참여정부가 들어선 이후에도 노동보건정책의 화두는 ‘기업친화적 노동보건정책을 어떻게 만들어낼 것인가’에 집중되고 있다. 이러한 기업친화적 노동보건정책은 앞서 이야기한 경제발전에 종속되는 노동보건이라는 속성에다가, 최근 세계화와 함께 논의되고 있는 ‘경쟁력의 논리’가 함께 포함된 화두이다.

그런데 세계화로 무장되어 있는 경쟁력의 논리는 기업단위의 효율성에 대한 논리에 치우쳐서 사회전체적인 측면에서 비효율성을 가져오는 문제점을 안고 있다. 특히 노동보건정책이 제대로 되기 위해서는 기업단위의 효율성에 대한 논의에서 벗어나 사회전체적인 측면에서 효율성을 고려하는 시각이 필요하다. 그런 시각에서 노동보건정책의 전환을 이루어야만 노동보건정책이 실제적인 효율성을 담보할 수 있다.

효율은 일정 비용에 따른 편익의 상대적 크기로서, 개별 기업에서 지불하는 비용과 편익을 비교하는 ‘미시적 효율’과 전체 사회의 비용과 편익을 비교하는 ‘거시적 효율’로 나눌 수 있다. 그런데 현재 정부의 노동보건정책은 전자만 강조되고 후자는 무시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이렇게 개별 기업의 효율성만 강조될 경우 지불여건이 있는 대기업들은 주어진 사회조건 속에서 나름대로 효율적인 방식으로 노동보건관리를 시행함에도 사회 전체적으로 노동보건의 문제점들이 불거지면서 거시적인 비효율성의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개별 기업 입장에서 노동보건은 다른 시설 투자에 따른 편익에 비해 직접적이고 단기적인 이익을 가져오지 않는다. 그러므로 투자의 우선순위에서 밀릴 수밖에 없다. 또한 개별 기업 입장에서 보면, 지불해야 할 비용도 상대적으로 크므로, 다시금 우선순위가 뒤쳐질 수밖에 없다. 특히 노동보건을 통한 기업의 편익은, 발생하더라도 안전보건의 특성상 투자에 비례하지도 않고 개별기업에 따라 불균등하다. 때문에 기업이 편익을 생각하여 노동보건에 투자할 것으로 기대하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일이다. 물론 노동보건에 대한 투자가 기업들 전체적으로 이루어진다면, 거시적 측면에서 기업 전체에 큰 편익을 줄 수 있지만 개별 기업이 이렇게 판단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불가능하다.

이러한 이유들 때문에 현재와 같이 획일적으로 이루어지는 기술적 개입을 통해 안전보건의 비용을 줄이려는 접근 방식으로는 안전보건의 문제를 실질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 개별 기업들이 비용을 부담하고 그에 따라 이익을 창출해 나가는 시장의 메커니즘이 노동보건에도 그대로 적용되도록 내버려둔다면 말이다. 

그러므로 향후 새로운 노동보건정책은 개별기업에서의 효율성이 아니라 전체기업 차원의 효과를 도모하는 방식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또한 노동보건이 기업 차원으로 획일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개인 수준의 권리보호로 확장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다양하고 풍부하게 전개될 수 있다. 그리고 문제해결에 소요되는 비용이 주요한 관심이 되는 것에서 탈피하여 문제의 원인을 과학적으로 분석하고, 체계적인 개입지점을 검토하는 방향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노동보건정책 전환을 위한 세 가지 제언

과 학적 정책은 문제의 원인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그에 따른 관리 원칙의 준수에 근거해야 한다. 이러한 점에서 새로운 노동보건체계는 단순히 그 구성요소를 나열한다고 수립되는 것이 아니라 그 요소들을 연결하고 묶어주는 ‘합목적성’이 있어야만 한다. 특히 노동보건문제의 원인을 올바로 파악하고, 그에 따라 그 해결방안을 체계적으로 제시해야 한다. 노동보건문제에 있어서도 그 발생 원인으로 제시되고 있는 세 가지 차원의 원인들, 기계론적 원인, 확률론적 원인, 그리고 체계론적 원인 모두가 고려되고 아우러지는 새로운 관점의 노동보건정책 및 노동보건의 관리 원칙이 수립되어져야 한다. 그에 따른 대략적인 방향은 다음과 같이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유해물질, 또는 유해인자로 대변되는 ‘기계론적 원인’에 대한 확인이나 측정이, 당대에 받아들여지고 있는 기술적인 표준과 일치되어야 한다는 점이 확고하게 준수되어야 한다. 객관적이고 정확한 측정을 위해 반드시 요구되는 표준화된 기술적 조건이 확보되지 못할 경우, 기술적 접근이 얼마나 해악이 될 수 있는가는 작업환경측정과 특수건강검진의 다양한 사례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현재의 작업환경측정과 특수건강검진은 ‘문제가 없기’를 바라는 기업측과 정부관료의 필요에 봉사하는 역할밖에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 것이 사실이다. 

둘째, 제대로 된 위해도 관리를 위해서 ‘확률론적 우선순위’가 적용되는 방식으로 노동보건의 관리가 이루어져야 한다. 노동보건문제의 원인을 확률론적으로 본다는 것은 다양한 요인이 노동보건에 영향을 미치고, 그 원인을 확률적으로 정의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한 요인을 크게 분류하면 환경요인, 작업요인, 개인요인을 분류할 수 있는데, 연구 결과에 의하면 각각의 요인에서 노동보건의 위해도가 다름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요인 중 가변성이 가장 크고, 노출의 변화에 따라 노동보건문제에 미치는 영향이 가장 큰 요인, 즉 노동보건의 위해도가 가장 큰 요인이 우선적으로 관리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산업안전보건관리는 노동보건의 위해도가 가장 높은 ‘환경관리’에 우선적으로 초점이 맞추어져야 하며, 다음으로 작업관리, 그리고 마지막 수단으로서 건강관리에 의존하여야 한다. 그러나 현재까지도 노동보건정책에서는 노동자 일터의 안과 밖의 환경이 노동자건강에 미치는 영향을 먼저 짚기보다는 노동자 개인의 생활습관을 탓하거나, 작업장내 ‘건강증진프로그램’ 등으로 노동보건의 문제를 왜곡, 축소시키려는 접근방식이 주요흐름을 주도하는 실정이다.

셋 째, 노동보건의 체계가 포괄성과 완결성을 갖추는 방식으로 관리가 이루어져야 한다. 하나의 사업장 단위도 그러하겠지만, 노동보건의 영역이 사회 전체로 확장될 경우 노동보건 문제에 대한 해결의 방향을 찾기 위해선 체계적 접근이 필수적이다. 산업재해와 직업병으로 표출되는 노동보건 문제는 노동보건 관련 자원, 재원조달 체계, 조직 및 서비스의 제공체계 등 노동보건 체계 전반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체계론적 접근과 관리는 그 체계의 목적이 무엇인지에 비추어 보아 과연 그 목적이 최종적으로 달성되고 있는지, 달성되고 있지 못하다면 어떤 구성요소에서 약점과 문제점을 노정하고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 현재의 노동보건 정책은 그 사회적 성격에 대한 이해가 척박하며, 원칙과 철학이 없는 단편적이고, 분절적인 정책의 나열이라고 밖에 할 수 없다. 노동자건강권을 위한 포괄적, 체계론적 접근을 위한 정부의 발상전환이 필요하다.

위에 열거한 세 가지가 정책적 원칙으로 확고히 세워진다면, 법과 제도의 정비를 포함한 노동보건 문제에 대한 중장기적인 해결 대안을 수립하는 데에 중요한 방법론적 근거를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 제작년도 :
  • 통권 : 제 95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