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품 조연’ 한비네 출범의 의미와 전망

노동사회

‘명품 조연’ 한비네 출범의 의미와 전망

이주환 0 4,074 2013.08.20 11:37

2012년 11월29일 한국 비정규직노동단체 네트워크(이하, ‘한비네’)가 출범했다. 비정규노동센터, 노동인권센터, 비정규직노동자지원센터 등 다양한 이름을 가진 각 지역 비정규노동단체들이 2010년 9월16일 첫 번째 1박2일 수련회를 가진 이후 2년 2개월여 만에 한울타리로 모인 것이다. 

‘한국 비정규직노동단체 네트워크’로 모이기까지

열악한 조건에서 지역을 텃밭으로 한눈팔지 않고 비정규직 문제 개선과 해결을 위해 애써온 지역비정규노동운동단체들은 그간 두세 달에 한번씩 12차에 걸쳐 수련회를 가지면서 소박한 교류 협력을 바탕으로 끈기 있게 의기투합해왔다. 수원, 전주, 울산, 대전, 청주, 서울, 안산 등 전국 각지를 돌아가며 탐방하듯 서로 만나왔다. ‘한비네’의 기본 수칙인 “회의는 짧고 굵게, 뒤풀이는 날 밤 새며 길게”를 때로는 지키고 때로는 어겨가며 부대껴온 세월 속에 동지애는 더욱 깊어지고 공동사업에 대한 열망은 더욱 커져갔다. 

그 과정에서 서로의 처지를 공감하고 비정규운동의 사명과 보람을 새삼 확인하면서 함께 둥지를 꾸릴 채비를 해왔다. 명칭과 관련한 여러 논의 끝에 ‘한국비정규직노동단체네트워크’로 결정하고 가입 대상을 민간 후원 단체와 지자체 예산 지원을 받는 단체까지 포함하기로 했다. 우선 초동주체로서 지속적으로 만나온 단체들을 중심으로 한비네를 출범하되 전국의 모든 비정규직노동단체들이 함께 할 수 있도록 네트워크로서 열린 형태를 유지하기로 하였다.

출범 당일 모인 전국의 지역비정규노동단체는 모두 23개였다. 참석 의사를 밝혔지만 오지 못한 단체까지 포함하면 한비네 참여 단체는 30여개 내외가 될 예정이다. 현재 전국에서 실제로 활동하고 있는 지역비정규노동단체는 40여 개 남짓인데 이중 4분의 3이 참여한 셈이다. 참석 단체를 성원으로 한 출범총회를 통해 초대 의장으로 한국비정규노동센터 이남신 소장이 뽑혔고 집행위원회를 꾸렸다. 

집행위원회는 조직분과, 정책분과, 제도개선분과, 사무분과를 두도록 했고, 조직분과장에 광주비정규직센터 명등룡 소장, 정책분과장에 안산시비정규직노동자지원센터 박재철 소장, 제도개선분과장에 청주노동인권센터 조광복 노무사, 사무분과장에 고양시비정규직센터 하윤성 상담실장이 선임됐다. 정기 회의는 격월로 전국의 참여 단체 소재지를 돌아가며 열기로 했다. 다소 소박하고 거칠지만 그간 각자도생(各自圖生)식으로 지역에서 포복하며 뿌리내린 지역비정규운동단체들의 소통터미널이 마련된 것은 의미 있는 결실이었다.

비정규 문제해결의 ‘명품 조연’으로 나설 터

21세기 외형적인 경제 규모로는 선진 자본주의 수준에 이른 한국 사회가 삶의 질에서는 대단히 심각한 문제에 직면했다. 특히 나쁜 일자리인 비정규직 양산과 차별 심화로 사회양극화와 빈부격차가 구조화・고착화되고 사회 전반의 불안정이 심각해져, 노동자 민중의 생존권이 벼랑으로 몰려가고 있는 현실을 근본적으로 뒤바꾸지 않고는 우리 사회의 진정한 발전이 불가능한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이런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우리는 당면해서는 비정규직 노동자의 차별 해소와 권리 신장, 궁극적으로는 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지향하고자 한다.

- 한비네 운영규칙 전문


<한비네 운영규칙 전문>에 한비네 출범의 목적의식과 지향이 뚜렷하게 담겨있는데, 이와 관련하여 확인해야 할 내용이 있다. 바로 비정규운동 전반에 대한 평가와 문제해결 전략에 대한 반성적 인식이다. 비정규직 문제의 핵심을 요약하면 절반에 육박하는 노동자가 절반에도 훨씬 못 미치는 임금을 비롯한 기업복지 및 사회복지 차별을 감수하는 노동시장의 심각한 불평등 양극화 현상이다. 

이 불평등 현상이 일시적, 부분적인 것이 아니라 IMF 경제위기를 분기점으로 상시적, 전면적인 것으로 십 수 년 동안 구조화, 고착화되어 왔다. 현재 통계상으론 800만 명대 규모에서 오르내리고 있지만 누락된 불법파견과 특수고용형태 노동자들까지 감안하면 1천만 명에 가까운 방대한 집단이 됐다. 2000년 통계청의 경제활동인구조사 근로형태별 부가조사가 실시된 이래 단 한 해도 정규직-비정규직 임금 격차가 줄어든 적이 없을 정도로 상대적 차별이 역진불가 양상으로 심화돼왔다. 결국 노동시장의 고용형태 양극화가 전체 사회 양극화의 핵심적 요인으로 자리 잡은 것이다.

안타깝게도 양대 노총으로 대표되는 한국의 조직노동운동은 ‘정규-비정규, 대기업-중소기업, 내국인-이주’란 삼각 이중구조 속에 포획돼, 계급주체 형성 전략을 토대로 하나가 될 전망을 빼앗긴 채 표류해왔다. 지금까지 자본과 그 이해를 대변해온 보수정권의 포위망 아래 생존권을 위협받고 있는 노동자들은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조직노동자와 미조직노동자로 갈라선 채 하나가 될 방도를 제대로 찾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는 형국이 지속되고 있다. 

그 사이 비정규직도 내부 격차가 점차 격심해져 다양한 고용형태와 노동조건으로 차별화된 채 분화를 거듭해왔다. 이런 조건에서 지난 십 수 년 동안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처절하고 극단적인 생존권 투쟁과 민주노총과 가맹 산별 노조 중심의 총력투쟁이 전개돼왔다. 그 피어린 투쟁의 결실로 인권 사각지대에 방치된 채 조명조차 받지 못했던 비정규직 문제가 사회 양극화의 핵심 의제로 부상할 정도로 사회여론화에는 성공했다.

그러나 정작 현실의 비정규직 문제는 아직까지 개선의 기미가 잘 보이지 않는다. 복지국가와 경제민주화가 화두가 된 2012년 양대 선거 공간에서 비정규직 문제도 주요 노동 의제로 거론되곤 했지만, 실제로 현장에서 일하고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삶의 질 개선으로 이어지지 못한 채 여야 간, 노사정 간 공방으로 끝나기 일쑤였다. 박원순 서울시장을 비롯한 지자체장들의 공공 부문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전환 확대가 눈에 띄지만, 전체 노동 시장의 흐름을 반전시키기엔 아직은 역부족이다. 비정규직 남용과 확산이 심각하다는 국민 여론이 대다수일 정도로 사회 여론화에는 나름대로 성공한 비정규직 문제가 실제 현실 개선으로까지 진전되지 못하는 그 간극을 어떻게 좁힐 것인지가 관건이 됐다.

양대 노총이 주도적으로 비정규직 문제해결을 선도할 여력이 고갈되어가는 가운데, 미조직 영역의 방대한 비정규직 당사자들이 감내하는 고통을 어떻게 해소하고 줄일 수 있을지 실질적인 방도가 요청되고 있는 형국이다. 당연히 대중조직의 역할을 대체할 수는 없겠지만 한비네는 지역과 현장에서 이 간극을 좁히는 데 기여하는 것을 목표로 실제 비정규 노동자의 현실을 나아지게 할 구체적 방도를 모색하고 실현하려 한다. 구두선이나 말의 성찬에 그치지 않고 작지만 의미 있는 문제해결 모델을 만드는 것에서부터 법제도 개선이나 정책 제시에 이르기까지, 실질적인 비정규직 문제 해법과 구체적인 로드맵을 내오는 데 디딤돌 역할을 하려 한다.

정리하면, 한비네 출범의 첫 번째 의미는 ‘명품 조연’을 자처하면서 비정규대중운동을 외곽에서 지원할 단체연합체가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특히 지역에 터를 잡고 특화된 방식으로 생존에 성공한 지역비정규노동단체들이 합세해, 전체 비정규운동의 방향도 모색하면서 한 단계 진전된 비정규운동의 모델을 만들어갈 교두보를 만든 것은 소중한 성과다. 

두 번째 의미로는 이른바 ‘비정규 실학파’가 형성됐다는 것이다. ‘비정규직 철폐’는 투쟁 구호로선 여전히 적절하고 필요하지만, 실질적인 해결 과제로서 비정규 문제를 바라보는 데는 지금 걸림돌이 되고 있는 게 사실이다. 현 단계 비정규 문제 해결의 진전을 위해선 철저하게 당사자 중심의 실사구시(實事求是) 관점에서 바라보고 문제 개선과 해결을 다양하고 창의적인 방식으로 추진해야 한다. 이런 전략과 정신에 입각해 제반 층위의 비정규 문제를 분석하고 해법을 모색할 네트워크형 운동체가 결성됐다는 것은 상당한 의미가 있다.

노동상담 네트워크 구축과 비정규사업 정책박람회 개최

사실 한비네 가입 단체들은 대부분 상근자 2~4명의 작은 규모로, 자체 사업을 감당하기에도 버거운 현실이다. 따라서 한비네의 고유 사업을 집행할 여력을 내기가 만만찮다. 한비네 출범 첫해에 욕심 부려 사업을 추진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은 이유다. 그래서 사업기조를 ‘지역에 기반한 현실성 있는 사업’으로 잡고 사업목표로는 ‘회원 단체의 역량 강화 및 안정화, 한비네 조직 안정화’로 정했다. 한비네의 기반을 다지면서 공동사업을 통해 실질적인 비정규직 문제해결을 모색해보겠다는 취지다.

주력 사업으로는 노동상담 네트워크 구축과 비정규사업 및 정책박람회, 교육사업 등을 계획하고 있다. 노동상담 네트워크 구축은 이미 두 달여 전부터 추진해온 공동사업으로 상담사례 관리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전국을 연계한 망을 구축하는 것이다. 더불어 상담사례를 기반으로 한 정책 발표 및 상담일꾼의 역량 강화도 병행하려 한다. 전국의 비정규노동단체들 대부분이 상담 사업을 기본으로 행하고 있는데, 상호 정보 교류와 사례 공유가 거의 되지 못했다. 상담이야말로 현장의 생생한 비정규 실태가 담겨 있는 소중한 기초자료인데도 제대로 취합하거나 비교 분석할 기회를 갖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한비네의 첫 번째 핵심 추진 사업으로 선정하여 2013년 초까지 프로그램 개발을 완료하고, 참여 단체를 최대한 늘려 상담사례를 폭넓게 모아 공유하고 상담의 질적 발전의 계기로도 삼으려 한다.

두 번째로 ‘비정규사업 정책박람회’를 추진할 계획이다. 각 지역별 특색 있는 여러 사업을 진행하고 있는 센터들이 한데 모여 사업 발표도 하고 지역실태조사 등 여러 다양한 정책 컨텐츠를 공유하고 비교하면서, 비정규정책 검증을 통해 상호 시너지 효과를 높일 방도를 찾는 정책박람회를 겸해서 진행할 계획이다. 지자체 예산 지원을 받는 위탁기관 예산운영 및 사업도 공유하고 해외사례도 소개하는 자리로 만들 생각이다. 아직 확정되진 않았지만 가능하다면 1박2일 사업 더하기 정책박람회로 추진해볼 작정이다.

세 번째 교육 사업으로는 ‘비정규 노동자를 위한 인문학 강좌’ 개설을 시도해 볼 계획이다. 노숙자나 교도소 수감자를 위한 인문학 강좌인 <클레멘트 코스>의 사례에서 확인됐듯이, 사회적 약자나 부적응자는 근본적으로 자존감을 되찾아야만 온전하게 자신의 몫을 할 수 있다. 한국 사회의 비정규 노동자는 이미 ‘2등 국민’ 신분으로 일상적인 고용불안과 차별에 고통을 받으면서 심각하게 심리적으로 피폐화되고 내면이 무너져내린 경우가 많다. 단순한 물질적 보상만으로 이 상처가 쉽게 치유될 수 없는 이유다. 따라서 자신의 인간적 자긍심과 자신감을 북돋울 계기가 필요한데 인문학 강좌가 그 유력한 방편이 될 수 있다. 상당히 의미 있는 사업으로 판단하고 의욕을 갖고 추진할 것이다.

천리 길을 가기 위한 첫 걸음

앞서 밝혔듯 한비네는 아직 많이 부족하다. 대표적 장점이라면 일희일비하지 않고 갖은 어려움을 이겨낸 경험이 다양하고 풍부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비정규 문제를 추상적 담론이 아니라 생생한 현실 속에서 개선하고 해결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고 어려운 과제인지를 열악한 조건에서 온몸으로 겪어본 동지들이 대부분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정파나 정견에 휘둘리지 않고 비정규 문제를 실사구시 관점으로 바라보고 실천해왔다는 점이다. 

이런 무형의 자산과 최근 급속히 늘어나고 있는 지자체 조례 제정을 통한 위탁기관 설립 방식으로 신설된 센터들을 기반으로, 한비네는 전국적 네트워크로서 소통과 교류의 터미널 역할을 자임하면서 비정규운동의 작은 디딤돌이 되려 한다.

한비네는 위기의 노동운동이 다시 활력을 회복할 수 있도록 깨알 같은 명품조연 역할을 해나갈 것이다. 진심어린 노력으로 단결과 연대의 기운이 지역과 현장에서부터 차오를 수 있도록 힘을 쏟을 것이다. 노동상담 네트워크 건설 등 알찬 공동사업을 통해 현실적인 제약을 고려한 비정규직 문제 개선과 해결 모델을 만들어나가는 데 주안점을 두고 열심히 땀 흘릴 것이다. 전국의 모든 비정규직노동단체들이 함께 하는 날까지 열린 자세와 조직형태를 유지하며 신나고 보람찬 비정규운동의 한 전형을 창출해나갈 것이다. 구구한 얘기보다 출범선언문의 일부를 인용하며 한비네의 전망을 대신하려 한다.

우리는 지역과 현장에서 노동자 민중과 애환을 나누며 활동해왔다. 특히 비정규직 문제의 심각성에 주목하면서 실질적인 문제 개선과 해결을 위해 다양한 방도로 힘써왔다. 누구나 위기를 말하는 오늘, 새로운 희망의 한줄기는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를 우직하게 실행해온 비정규노동단체의 내일에 있다고 감히 믿는다. 역량은 부족하지만 포부와 바람은 크고 깊다. 뿌리가 건강하고 튼튼해야 나무가 잘 자란다. 우리는 빈사 상태에 빠진 노동운동을 되살리는 잔뿌리가 되어 소임을 다하고자 한다. 추상적 담론을 넘어 실사구시적인 관점으로 비정규직 문제 개선과 해결 사례가 우후죽순으로 솟아날 수 있도록 공동사업을 모색할 것이다. 시작하면 반드시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다. 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어떻게 만들어갈 수 있는지 실례를 쌓아갈 것이다. 노동자가 차별받지 않고 착취되지 않는, 자본주의를 극복한 대안사회의 상을 소박한 수준에서부터 현실로 만들어갈 것이다.

  • 제작년도 :
  • 통권 : 제16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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