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노동안전보건 제도

노동사회

미국의 노동안전보건 제도

편집국 0 4,950 2013.05.19 01:15

일반적으로 미국의 노동안전보건제도는 ‘선진국’ 제도라고 하기에는 많은 부분이 부족하다고 여겨진다. ILO에서는 2004년에 각국의 노동안전보건 제도와 통계수치를 근거로 ‘노동안전지수(Work security index)’를 개발하여 각국의 노동안전보건 수준을 평가하였는데, 이 평가 결과에 따르면 미국은 전 세계 95개 평가국 중 29위로 슬로바키아, 크로아티아 등 동유럽 나라와 비슷한 수준으로 평가되었다. 미국의 경제 규모와 노동력 규모에 비추어 실로 부끄러운 결과이다. 

이러한 결과는 지난 호 유럽의 노동안전보건 제도를 소개하면서 주장하였던, ‘한 나라의 노동자 건강 수준은 그 나라의 노동조합 운동의 역량과 노동자 정치세력화에 정비례한다’는 가설적 명제를 뒷받침하는 것이다. 노동자정당이 없고, 노동조합의 조직력이 취약한 미국의 노동자 건강 수준은 국가의 경제적 위치와 크게 동떨어져 중진국 수준에 머물러 있다. 이러한 상황은 최근 부시 행정부 들어 지속적으로 진행된 ‘규제 완화’ 정책에 의해 더욱 심각해지고 있다. 부시 행정부가 공격적으로 ‘기업친화적’ 정책을 추진함에 따라 지금의 제도조차 개악될 상황에 직면해 있다. 이에 이 글에서는 미국의 노동안전보건 제도 전반에 대해 간략히 살펴보고, 최근 부시 행정부에 의해 진행되고 있는 제도 개악 흐름과 그에 대한 노동조합의 대응을 훑어보고자 한다.

주별로 분권화된 노동안전보건 제도

미국의 노동안전보건 제도는 유럽의 여러 나라들과는 달리 각 주별로 차이가 있다. 물론 1970년에 닉슨 행정부에 의해 제정된 ‘직업안전보건법(Occupational Safety and Health Act, OSHAct)’이 연방법으로서 주요한 가이드라인 역할을 하고 있지만, 각 주별 제도의 자율성의 정도가 큰 편에 속한다. 직업안전보건법은 각 주정부의 독립적 규제를 위한 가이드라인 정도의 역할이고 기준의 제정과 집행은 전적으로 주정부의 책임에 맡겨져 있다. 주정부는 연방정부의 가이드라인을 따르지 않을 수도 있는데, 그에 따른 벌칙은 연방 정부의 예산 지원을 받지 못하는 것밖에 없다. 행정적 어려움 때문에 연방정부의 역할을 최소화할 수밖에 없다고 설명되고 있지만, 미국내 개혁주의자들은 연방정부의 개입이 더욱 강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각 주별로 특화된 제도 때문에 전체 노동자의 일반적 조건을 개선시키기 위한 노동조합의 활동에 제약이 따른다는 것이 이 주장의 주된 근거이다.

취약한 노동자 참여 구조

지난번 연재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노동안전보건 제도가 제대로 운영되기 위해서는 노동자의 참여가 필수적이다. 법과 제도가 아무리 잘 갖추어져 있다고 하더라도 노동자의 참여 없이는 그러한 제도가 사문화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미국은 유럽의 나라들에 비하여 노동자 참여 구조가 제대로 마련되어 있지 못하다. 미국은 취약한 노동자 참여 구조를 보완하기 위하여 정부 기관의 조사, 감독 강화를 추진하여 왔으나, 이러한 정책에는 한계가 있음이 명확해졌다. 더군다나 최근에는 법률 위반에 대한 조사, 감독 기능을 담당하고 있는 직업안전보건청(Occupational Safety and Health Administration, OSHA)의 재정과 인력을 축소하려는 움직임이 가시화되면서, 위의 변명조차도 궁색해졌다. 몇몇 대기업 노동조합의 경우 단체협상을 통하여 노동자 참여 구조를 마련하기도 하였으나, 법적 제도적 뒷받침이 미비한 상태에서 현장에서의 노동자 참여가 활성화되기 힘들다는 판단 아래 노동조합은 작업장 내의 노동안전보건위원회 강화, 현장에서의 교육과 훈련 내실화, 안전보건 활동에 대한 기업의 제제 행위 금지 등을 요구하고 있다.

노동안전보건 규제조차 경제성으로 따지는 나라

sylee_01.jpg미국은 기업 활동에 영향을 끼칠 것이라고 생각되는 사회 정책에 대해 비용-편익 분석을 꼭 행하도록 강제하는 몇몇 나라 가운데 하나이다. 이는 새롭게 제정될 정책뿐 아니라 기존에 존재하는 정책에도 정기적으로 행해지는데 이 분석 결과, 비용에 비해 편익이 적다고 판단되는 정책은 입안되지 못하거나 폐지된다. 그런데 이 분석은 단순히 ‘경제적’ 가치만을 비교의 대상으로 삼기 때문에 노동안전보건 관련 정책들은 이 분석을 통과하기가 쉽지 않다. 물론 미국의 연방대법원은 “안전보건에 대해서는 비용에 대한 고려보다 더 많은 고려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판시를 내려, 노동안전보건 제도가 단순히 비용-편익 분석 결과에 따라 폐기되어서는 안 된다고 천명하였지만, 현실에서는 비용-편익 분석에 대한 압력 때문에 노동안전보건 관련 규제가 끊임없이 위협받고 있다.

부족한 행정력

미국에서는 직업안전보건청의 감독관이 기업의 직업안전보건법 준수 여부에 대한 감시와 감독을 수행하지만 직업안전보건청의 자원이 매우 제한되어 있어 극소수의 기업에 대해서만 감시와 감독이 이루어지고 있다. 특히 공화당 정부가 들어설 때마다 직업안전보건청의 예산은 깎이기 일쑤여서, 부족한 자원에서 효율적인 행정 집행을 수행하기 위하여 직업안전보건청은 소위 ‘자율보호 프로그램(Voluntary protection programs)’을 권장하고 있다. 기업이 자율적으로 안전보건정책을 입안하여 추진하고 일정 기준에 맞으면, 향후 정부가 감시·감독을 안 하겠다는 것이 이 프로그램의 요지다. 미국의 직업안전보건청은 부족한 인력과 예산을 이유로, 감시·감독의 효율성을 달성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임을 강조하고 있으나, 미국의 노동안전보건 단체들은 기업이 직업안전보건청으로부터 자율보호 프로그램을 수행하는 기업으로 선정 받은 이후에는 감시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을 악용해 노동조건을 더욱 나쁘게 만들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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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간단체의 활성화

이와 같이 상대적으로 부실한 노동안전보건 시스템 속에서 다른 선진국에 비해 특징적인 면이 있다면, 민간단체 활동이 활발하다는 것과 노동안전보건 영역의 과학적 연구 수준이 높다는 것이다. 정부 기구와 노동조합의 활동이 상대적으로 약한 것의 이면일 수 있지만, 미국에는 시민, 노동조합 활동가, 일반 노동조합원, 산재노동자, 전문가 등이 함께 결합하여 지역 수준에서 노동안전보건 활동을 벌이고 있는 민간단체의 활동이 역동적이다. 이들은 ‘직업안전보건위원회 그룹(Committees on Occupational Safety and Health group. COSH group)’이라 불리는데, 전국적으로 50개 이상의 지역조직을 형성하여 지역 수준에서 안전보건에 대한 노동자 교육, 정책 지원 사업을 벌이고 있다. 이들의 활발한 활동과 그나마 수준 높게 진행되는 직업안전보건청의 노동자 교육 사업으로 인해 노동자에 대한 노동안전보건 교육은 잘 이루어지고 있는 편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미국은 다른 나라와 비교해서 뒤떨어지지 않는 영역이 딱 하나 있다. 바로 노동안전보건 영역 전문가들의 연구 수준과 기술 수준이다. 특히 산업위생사들의 수준과 기능은 다른 어느 나라에 비해 뛰어난 것으로 평가받고 있고, 그에 따라 노동안전보건 시스템 운영에 있어 산업위생사들의 역할이 상대적으로 크다. 그리고 국립직업안전보건연구소(National Institute for Occupational Safety and Health, NIOSH)에서 이루어지는 각종 역학 연구와 노동안전보건 연구 수준은 세계적이라고 할 수 있다.

부시 행정부의 공격

일찍이 부시 대통령은 2001년 3월 의회에서 통과되었던 근골격계질환 예방을 위한 인간공학 기준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함으로써 미국을 국가적 차원에서 근골격계질환에 대한 그 어떤 규제도 없는 나라로 만든 바 있다. 모든 전문가들과 노동조합이 한결같이 요구했고, 무려 10년에 걸친 토론과 합의를 통해 만들어져 의회를 통과한 법률을 단지 몇몇 기업의 이해를 위해 휴지조각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이것은 단지 하나의 예에 불과하다. 부시 행정부의 노동안전보건에 대한 규제완화 정책은 매우 노골적이다. 부시 행정부는 거리낌 없이 “기업 활동을 위해 노동안전보건 규제는 완화되어야 한다”고 천명하며 노동안전보건에 대한 예산 삭감, 규제 완화를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특히 최근 공화당 의원들의 발의로 하원의회에서 4개의 직업안전보건법 개정안이 통과되어 상원으로 넘어갔다. 개정안들은 모두 직업안전보건청의 자원을 제한하고, 기업의 직업안전보건법 위반 행위에 대한 처벌을 완화하며, 노동안전보건 사안에 대한 결정권을 기업 측에 넘기는 내용으로 노동자 건강과 안전에 심각한 위협을 가하는 법안들이다.

공화당과 부시 행정부의 위험을 인지한 많은 노동안전보건 활동가들이 지난 대통령 선거에서 “부시는 노동자들을 죽이고 있다”는 구호로 부시 행정부 시기에 개악된 노동안전보건 정책들을 열거하며 낙선 운동을 벌였지만, 부시 재선 이후 미국의 노동자들은 혹독한 대가를 치르고 있는 셈이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미국의 노동안전보건 수준이 나아질 전망이 그리 밝지 않다는 점이다. 최근 미국노총(AFL-CIO)으로부터 국제서비스노조연맹(SEIU)과 전미트럭운송조합(Teamsters)이 떨어져 나가는 과정 중에서 진행된 논쟁 중 노동안전보건과 관련된 사항이 있었다. 국제서비스연맹과 전미트럭운송조합 측은 민간부문은 7.9%, 공공부문을 포함해야 기껏해야 12.5%밖에 안 되는 노동조합의 조직률을 높이기 위해 총연맹이 자체 구조를 슬림화하여 조직화 사업에 더 많은 투자를 하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의 연장선상에서 이들은 총연맹의 노동안전보건 부서를 없애야한다고 주장하였다. 낮은 조직률을 끌어올리는 것에 집중하기 위하여 노동안전보건에 대한 노동조합의 투자는 포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조직화를 둘러싼 논쟁 가운데 두 조직은 분열되고 노동안전보건 부서 폐지에 대한 논쟁은 잦아들었지만, 미국의 노동조합운동에서 노동자 건강과 안전이 차지하고 있는 위치를 상징적으로 보여준 사건이라 하겠다. 유럽의 여러 나라들에서 ‘노동조합의 조직률 향상을 위해서는 노동안전보건 사업이 강화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펼쳐지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인 모습이다.

노동자 건강? 남이 지켜주지 않는다

정리하면 미국은 낮은 노조조직률, 노동자 정당의 부재 등으로 인하여 노동안전보건 영역에 노동자 참여 구조가 취약한 형태로 제도가 마련되었다. 그나마 조직된 노동조합에서도 노동안전보건에 대한 관심이 그리 크지 않은 가운데, 노동안전보건 제도 운영의 주도권은 직업안전보건청을 비롯한 정부 기구가 쥐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행정부의 성격에 따라 오락가락 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부족한 노동조합의 노동안전보건 활동의 간극을 매우고자 지역 차원에서 활발하고 역동적인 풀뿌리 민간단체와 연구전문단체에 의한 활동이 이루어지고는 있으나, 부시 행정부 들어 파상적으로 진행되는 공세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 그 결과 미국의 노동자 건강 수준은 국가의 경제적 규모에 비추어 상당히 부끄러운 수준이라고 할 수 있는 상위 30%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 미국의 예를 통해 노동자의 건강 수준은 그 나라의 경제적 수준에 따라 자동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요소에 영향을 받는 복합적 작용의 결과임을 알 수 있다. 자신의 건강을 지키려는 노동자의 지속적 투쟁 역사의 유무는 매우 중요한 설명 변수라고 할 수 있다.

  • 제작년도 :
  • 통권 : 제10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