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쓰비시 중공업 나가사키 조선소의 사례(1955~1965)

노동사회

미쓰비시 중공업 나가사키 조선소의 사례(1955~1965)

편집국 0 6,354 2013.05.29 0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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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사회와역사』 통권 제76집(2007년 12월)에 수록된 논문을 요약한 것으로, 참고문헌의 표기는 생략하였습니다. 참고문헌을 포함한 좀 더 자세한 내용은 원본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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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머리글

이 글은 ‘일본적 노사관계’에 대하여 이를 역사적으로 형성된 자본/경영의 지배구조로 바라보고 그 형성과정을 살펴보고자 한다. 일본적 노사관계에 대해서는 기업 경영에 노동조합이 종속되어 있고, 노동자의 자주성과 권리가 취약하다는 점이 지적되었다. 또, 일본적 노사관계는 ‘기업사회’의 성립과 지배의 기초를 이루고 있으며, 사회당 몰락과 일본 정치의 보수화의 배경을 이룬다고 하는 비판도 제기되었다. 즉, 기업사회 혹은 기업중심사회에서는 경쟁과 효율성의 논리가 규제되지 않고 시민사회 영역까지도 지배하게 되어 과로사·가족관계의 해체·과도한 학력경쟁 등 다양한 사회적 병리현상이 생겨나는데, 이러한 기업사회가 형성된 배경에 일본의 민간대기업 영역에 형성된 지배구조와, 그 지배구조에 편입된 노동조합이 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일본 사회당은 유럽의 사회민주당과 달리 극적인 몰락의 길을 걸었는데, 민간대기업노조의 ‘기업주의화’와 ‘현대 일본사회의 기업지배의 특수한 구조’에 일본 사회민주주의의 취약성의 뿌리가 있다고 평가되었다. 

<미쓰비시나가사키조선소(三菱長崎造船所)>에는 1950년대 중반 이후 계급적·전투적 노동조합운동의 주도권이 확립되어 있다가 1965년 ‘제2노조’의 결성을 계기로 <동맹>계열의 주도권이 확립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노동운동의 노선갈등이 극적으로 표출되고 협조적 노사관계로 재편되었다. 이 글에서는 <미쓰비시나가사키조선소>에서 이른바 ‘일본적 노사관계’가 형성되는 과정을, 기업별 노동조합체제와 협조적 노사관계의 형성에 초점을 두고 살펴보려 한다. 특히, 일본적 노사관계가 형성되기까지 전개된 노자 간의 갈등과 대립, 그리고 노동조합 내부에서 전개된 노선다툼에 주목하려 한다. 자본주의 경제체제하에서 노동조합의 기능과 역할에 관한 운동 노선의 차이가 어떻게 드러나는가 하는 점을, 생산성 향상 운동 및 기업합리화에 대한 노동조합의 태도, 그리고 임금교섭 방식에서 나타나는 기업별주의와 산업별주의의 대립 양상을 통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2. 1950년대 <나가사키조선소>의 노동조합과 노사관계

전후 일본 조선산업 노동운동의 전개 양상


1945년 이후 일본 조선산업의 노동운동은 크게 <전조선>(全日本造船??組合)과 <조선총련>(全?造船??組合?連合)의 대립구도로 전개되었다. 이는 이 시기 일본의 노동운동 내에 형성된 <총평>(全日本??組合?評議?) 대 <총동맹>(日本??組合?同盟)의 대립구도와 관련되어 있었다. <총평>은 ‘사회당-총평블록’을 결성하여 계급주의적 관점에서 1950~60년대 일본의 노동운동을 주도하였고, <총평>의 좌경화에 반발하여 1951년 6월 <총동맹>이 재건되었으며, 1964년에는 협조주의적 우파 노동운동의 결집체로서 <동맹>(全日本???同盟)이 출범하여 그 세력을 확장해갔다.

한편 1946년 9월 결성된 <전조선>은 정당으로부터의 독립을 표방하였지만 행동강령에는 세계노련(WCFTU) 참가를 명시하였으며, <총평>에 직접 가입하지는 않았지만 이를 지지하는 경향이 강했다. <전조선>은 좌파가 주도하고 있었지만 전후 혼란기에 ‘생산부흥’과 ‘고용확대’라는 대중적 요구에 기초해서 출범하였고, 여기에 우파 혹은 중립파도 함께 참여하였기 때문에 <총평> 참여 여부에 내부적으로 일치를 볼 수는 없었다. <전조선>의 조합원은 약 7만4천 명에 달하여 거의 모든 조선관계 노동조합을 포괄하고 있었다. <전조선>과 방침을 달리하는 일부 노동조합은 <조선연합회>(?同盟全?造船??組合連合?)로 결집했는데, <조선연합회>는 ‘반공주의’, ‘반전체주의’를 내세우며 <전조선>과의 차이를 분명히 하였고, 1951년 6월 <총동맹>이 재건될 때 그 중심 세력의 하나가 되었다. <조선연합회>는 <전조선>을 탈퇴한 미쓰이조선노동조합 등 <조선노동조합협의회>와 통합하여 1951년 2월 <조선총련>을 결성하였다. 당시 <조선총련>의 조직인원은 <미쓰비시고베조선> 등 3만6천 명 수준이었다. <조선총련>은 1952년에 <총동맹>에 일괄 가맹하여 그 핵심조합이 되었다. 이렇게 해서 1950년대 일본의 조선산업 노동운동은 <전조선>과 <조선총련>을 각각 축으로 하여 진행되었다. 

미쓰비시중공업의 분할

1945년 말 이후 미쓰비시중공업에는 각 사업소, 공장별로 노조 설립이 잇달아서, 1949년 7월 말 기준으로 총 32개의 노조가 설립되었다. 각 사업소 단위로 직원과 공원이 통합된 조합을 설립한 경우, 별개로 설립한 경우 등 다양한 형태를 취하였다. 상급단체와의 관계를 보면 <전조선> 소속이 7개 조합 19,152명, <총동맹> 소속이 7개 조합 13,466명, 그리고 <산별회의> 계인 <전일본금속노동조합>과 <전국자동차노동조합> 소속이 각각 3개 조합 3,550명과 2개 조합 3,700명이었다. 이 밖에도 상급단체가 없는 경우가 16개 조합 11,960명이 있었다. 

한편 미군정은 일본의 재벌해체를 목적으로 1947년에 ‘집중배제법’을 제정하였다. 이에 따라 미쓰비시중공업은 1950년 1월에 <동일본중공업>, <중일본중공업>, <서일본중공업> 3개의 회사로 분할되었고, 이는 다시 1952년 5월에 <삼릉일본중공업>, <신삼릉중공업>, <삼릉조선>으로 각각 그 회사명이 변경되었다.

나가사키조선소의 노동조합

<나가사키조선소>에는 1946년 1월 공원(工員)노동조합이 결성되었다. 이 조합은 1946년 9월 <전조선>이 결성되자 그 해 12월에 가입하여 <전조선 나가사키지부>가 되었다. 한편 한국전쟁을 계기로 일본 전역에서 공산당과 그 동조자를 직장에서 추방하는 조치(레드 퍼지)가 실시되어 1950년 11월 말까지 민간산업에서 9,611명, 정부기관에서 1,171명이 해고되었다. <전조선>의 반대방침에도 불구하고 조선산업에서는 601명이 해고되었는데, <나가사키조선소>에서도 82명이 추방되었다.

1950년의 ‘레드 퍼지’와 파업의 실패로 침체에 빠졌던 노동운동은 1955년 조선 경기가 살아나면서 다시 활발해진다. 1955년 2월 <삼릉조선노동조합> 제16회 중앙위원회에서 <나가사키조선지부>가 “임금지불형태, 제반 제도를 발본적으로 개혁, 민주화하기 위한 요구”를 제안하였고, 이후 1956년 6월에는 직원과 공원의 구분을 폐지할 것, 공원에게도 월급제를 실시하라는 요구를 결의하였다. 1957년 4월 <삼릉조선노동조합>은 <전조선>에 일괄가입할 것을 결정하였는데, 당시 <삼릉조선노동조합>의 7개 지부 가운데 <전조선>에 가입해 있던 곳은 <나가사키조선지부>와 <히로시마조선지부>의 두 곳뿐이었다.

한편, <신삼릉중공업>의 경우 <신삼릉중공노동조합>은 <총동맹>에 가입해 있었는데, 8개 지부 가운데 <코오베조선지부>는 <조선총련>에도 가입되어 있었다. <삼릉일본중공업>의 경우 <삼릉일본중공노동조합연합회>를 결성하고 있었는데, 이 가운데 <요코하마조선지부>만이 <전조선>에 가입한 상태였다.

미쓰비시 계열의 중공업 사업장 가운데 <삼릉조선지부>와 <나가사키조선분회>가 <전조선>의 핵심 사업장으로서 가장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삼릉조선지부>는 임시공제도를 폐지하는 투쟁도 적극적으로 전개했다. 1955년 이후 조선경기가 살아나면서 경영자는 주로 사외공과 임시공을 늘려서 노동력 수요에 대응하였다. <나가사키조선분회>는 1958년 이후 ‘임시공제도 철폐 투쟁’을 전개하여 1957년 당시 약 3천 명이던 임시공의 대부분이 상용화되었으며, 1963년에는 임시공제도가 사라졌다. <나가사키조선분회>는 정치투쟁과 연대활동에도 적극적이었다. 1960년 ‘미·일 안보조약 개정 저지투쟁’에서는 <전조선>의 방침에 따라서 1시간씩 두 차례 파업을 벌였다. 또 이 시기 ‘총자본과 총노동의 대결’이었던 ‘미이케(三池)탄광 파업’에 약 2천 명을 지원자로 파견하기도 하였다. 즉, 1950년대 말과 1960년대 초의 <나가사키조선분회>는 <전조선>내에서도 가장 전투적인 좌익 노동운동의 이념과 활동을 보여주었다.

이 시기 <나가사키조선분회>는 작업현장에 대하여 강한 규제력을 행사하였다. 하지만 대형선박의 효율적인 건조 체제를 확립하고자 하는 경영자에게는 현장에 대한 노동조합의 이와 같은 규제 관행이 극복되어야 할 장애물로 인식되었고, 삼릉계열 중공업 3사의 합병은 이러한 <나가사키조선소> 노사관계의 존재방식 자체를 문제 삼게 되었다.   

3. 기업합병과 노사관계 재편의 추진

삼릉중공 3사는 1963년 7월에 합병 방침을 결정하였다. 이는 기업단위 노동조합의 조직통일 문제를 현안으로 제기했고 노사관계 재편의 주요한 계기가 됐다. 이 과정에서 노동운동 노선상의 다양한 쟁점이 제기되었다. 크게 보면 자본주의적 임노동관계 자체를 지양하고자 하는가의 여부, 즉 노동운동의 기본노선의 차이가 가로놓여 있지만 ‘기업별 노동조합’과 ‘산업별 노동조합’, 혹은 ‘기업단위 투쟁’과 ‘산업별 통일투쟁’에 대한 의미 부여, ‘기업합리화와 생산성 향상운동에 대한 태도’ 등이 구체적인 쟁점으로 부각되었다.

1964년 춘투의 패배와 우파집행부의 등장

먼저 1964년 춘투에서는 합병을 앞둔 3사의 급여수준 및 체계의 통일이 쟁점이 되었다. 1964년 춘투에서 ‘기업 내 임금관리 정책’에 맞서면서 ‘산업별 통일투쟁’을 강조한 <삼릉조선지부>가 고립된 투쟁을 전개하다 패배하고, 이를 계기로 <삼릉조선지부>에 우파인 <쇄동(刷同)>계 집행부가 들어선다. 1965년 <삼릉조선지부> 정기대회에서 ‘기업합병에 따른 노동조합의 조직통합’과 ‘생산성 향상 및 합리화에 대한 방침’을 둘러싸고 <쇄동>계 집행부의 원안이 전면 부정되자, <나가사키조선소>에서 <쇄동>에 의해 ‘제2조합’이 설립되어 다수파가 되면서 <전조선>계열은 소수파로 몰락하게 된다. 이 과정을 차례로 살펴보도록 하겠다.

1964년 6월1일자로 삼릉중공 3사의 합병이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1964년 춘투를 앞두고 3사 노조 간에 협의가 이루어졌지만 합의에는 이르지 못하였다. <삼릉조선지부>는 <전조선>의 통일투쟁 방침에 따라서 조합원 1인당 평균 5천엔의 인상을 요구하고, 쟁의권을 확립하여 87%의 찬성으로 <전조선> 본부에 이를 위임하였다. 그런데 <삼릉조선> 경영자는 1964년 3사 합병을 앞두고 배치전환을 가능하게 하는 통일적인 노무관리체제를 구축하기 위하여 ‘본급통일’이 필요하였고, 이에 따라 임금 1,400엔 인상을 제시하고 이 금액을 모두 3사 통일을 위한 본급조정에 사용할 것이라고 회답하였다.

이에 대해서 <삼릉조선지부>는 본급조정은 임금인상에 대한 회답이 아니라고 보고 파업투쟁에 돌입하였다. 회사 측의 본급조정방안은 임금의 연령별 격차와 양성공·중도 입사자 간의 격차를 확대하는 것으로서, <삼릉조선지부>가 그동안 추구해 온 임금정책과 대립되는 것이었다. 즉, <삼릉조선지부>는 연령별 격차와 직공 간 격차 등 임금격차를 축소하고, ‘연공임금의 타파’와 ‘동일노동 동일임금’의 실현을 전망하며, 미래의 산업별, 직종별 표준임금에 대한 지향성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4월18일 회사 측이 최종안으로 2,500엔을 인상하고 이 가운데 2,000엔을 본급조정에 사용하겠다고 제안하자, <신삼릉중공노동조합>과 <삼릉일본중공노동조합연합회>는 이를 받아들였고 <삼릉조선지부>는 거부하였다. 이후 <삼릉조선지부> 내에도 회사 측 최종안의 수용여부를 둘러싸고 분열이 발생하여 5월13일 장기단독투쟁 여부를 묻는 조합원 찬반투표는 재적인원 대비 50.37%의 찬성을 얻는 데 그쳤다.

그리하여 <삼릉중공업>이 발족하는 6월1일부로 실력행사는 해제되었고, <삼릉조선지부>는 패배를 인정하고 회사 측의 최종안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결국 1964년 춘투는 <삼릉조선지부>의 완패로 종결되었다. 그 결과 연령별 본급 격차가 확대되어 중장년층의 월수(月收)가 증대되었고, 승급 사정(査定)이 노동자의 승급에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되었다. 이로써 승급을 둘러싼 노동자 간 경쟁이 일어나게 되는 계기가 마련되었으며, 또 새로운 노무관리체제하에서 중시되는 직제(職制)층의 경제적 기반이 되었다.

1964년 춘투의 실패 이후, <삼릉조선지부>의 중앙집행위원회가 총사퇴하고 새로운 집행부가 출범하면서 우파인 <쇄동>계가 증가하였다. 또 1964년 11월의 <삼릉조선지부> 제31회 대회에서는 ‘조직통일에 관한 방침’이 다시 변경되었는데, 그 내용은 산업별 조직의 실현을 지향하면서도 단일조직으로서 기업별 조직의 실현에 우선적 중점을 두는 것이었다. 그런데 1965년 9월 <삼릉조선지부> 제32회 정기대회에서 이러한 조직방침과 함께 ‘합리화’에 대한 새로운 집행부의 방침이 부정되자 이에 반발하여 우파가 제2조합의 결성을 추진하게 된다.  

4. ‘합리화’를 둘러싼 운동노선의 대립  

생산성 향상 운동과 노사협조주의의 대두


‘생산성 향상 운동’에 대한 노동조합의 태도는 1950~60년대 일본노동운동의 노선을 가르는 중요한 잣대가 되었다. 생산성 향상 운동에 대하여 <총동맹> 등 우파 노동조합이 이를 지지하며 참가한 반면에, <총평>은 이를 비판하며 참가를 거부하였다. 

<총평>은 1956년의 정기대회에서 ‘생산성 향상 운동과 대결하는 입장’을 강조하였다. <총평>은 생산성 향상 운동에 대하여 ①신기계의 채용 및 자동화, ‘과학적 노무관리’의 채용, 계통적인 감원, 임금체계의 개악, 안전경쟁 및 능률 향상운동의 전개, 실노동시간의 실질적 연장, 복리후생비의 삭감 등 착취강화의 모든 방법을 전면적으로 동원하여 자본의 이윤을 극한까지 확대하려고 하는 것이고, ②국민운동으로서의 사상공세를 전개하여 노동자의 계급의식을 마비시켜 노동조합을 어용화하고 사실상 해체하려고 하는 계급협조의 캠페인이라고 규정하였고, 1957년에는 직장을 기초로 하여 생산성 향상 운동과 투쟁하는 방침을 채택하였다.

한편 <일본생산성본부>가 내건 ‘생산성 운동의 3원칙’에 대하여 <총동맹>은 1955년 6월 중앙위원회에서 생산성 운동 8원칙을 확인하고 생산성 운동에 참여하기로 결정하였다. <조선총련>도 <총동맹>의 일원으로 여기에 참여하였다. 이후 <국제금속노련 일본협의회>(IMF-JC)가 1964년 5월16일 새롭게 결성되고 <총동맹>이 1964년 11월 새롭게 결성되는데, 이 두 조직의 탄생은 생산성 향상 운동의 진전과 결합하여 노사협의제가 확립되는 데 기여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반면에 <전조선>에서는 1956년 4월의 제17회 대회에서 ‘생산성 향상 운동 반대’ 방침을 결정하였고, 1962년의 <반야중공업>(飯野重工業)의 ‘감원합리화’를 계기로 본격적인 합리화 반대투쟁에 착수하였다. <전조선>은 1964년의 정기대회에서 합리화 반대투쟁 방침을 구체화하는데, 그 내용은 ①완전고용의 유지, ②소정 내외의 노동시간 단축, ③요원삭감·교대제·배치전환·다능공화 등에 의한 노동강화 반대. ④이상을 위한 조사활동 등이고, 합리화에 관한 사전협의제, 직장투쟁체제의 확립을 통하여 기업별(합리화) 방위투쟁으로부터 산업별 공격으로 전환한다는 것이었다. 생산성 향상과 기업의 합리화에 대한 노선의 차이는 삼릉중공 3노조는 물론 <삼릉조선지부> 내 정파 간에도 그대로 드러났고, 이는 조합을 분열로 이끈 또 다른 쟁점이 되었다.  

합리화에 대한 대응을 둘러싼 <나가사키조선분회>내의 갈등

기업의 생산성 향상과 합리화에 대한 대응을 둘러싼 노선 대립은 삼릉중공 3사 합병을 계기로 다시 발생하였다. <삼릉중공업>은 합병 후 곧바로 불황에 직면하였다. 회사에서 마련한 개선대책의 주요 내용은 조직 간소화, 직접인원과 간접인원의 비율 시정을 비롯한 노동력의 재배치, 이를 통한 생산부문의 강화 등이었다. 특히 요원합리화에 따른 대규모의 출향(出向)과 배치전환, 혹은 잉여인원의 발생이 예상되었다. <삼릉중공업>은 1965년 9월 14개의 항목에 걸친 ‘합리화안’을 노동조합에 제시하였는데, <나가사키조선소>의 경우 총 1,307명의 배치전환 외에 사외공의 약 반수가 해고될 처지에 놓였다. 

<나가사키조선분회>는 이와 같은 합리화에 대해서 반대하는 전면적인 투쟁 방침을 채택하였는데, 이는 <나가사키조선분회> 내의 정파구도와 관련되어 있었다. <나가사키조선분회> 내에는 <동지회>, <쇄신동지회>, <공산당>, <사연>의 4파벌이 존재하고 있었다. <나가사키조선분회> 내의 파벌대립은 1950년대 후반 이후 공산당계 활동가의 영향력이 증대하자, 이에 대항하여 민동우파, 즉 <쇄동(刷同)>의 독자조직이 결성되면서 시작되었다. 1955년 이후 공산당계 활동가가 <나가사키조선분회>의 간부를 맡기도 하였고, 1959년 10월28일에는 ‘10월혁명 42주년 기념 나가사키조선 집회’를 개최하면서 공산당계 세포가 공공연하게 활동하게 되었다.

<나가사키조선 쇄신동지회>(약칭 쇄동, 刷同)는 1959년 5월21일 결성되었는데, “진정한 민주적 사회주의의 확립, 조합의 쇄신강화, 기업의 민주화와 발전, 극우 및 용공 좌익편향 배제, 경제적 투쟁에 주안점을 두고 관념적 계급투쟁을 배제할 것” 등을 내세웠다. 결성 당시의 회원은 467명이었다.

한편, 1960년에는 <나가사키조선 사회주의연구회>(약칭 사연, 社硏)가 결성되었는데 이는 1960년 공산당 나가사키조선 세포의 활동가가 당으로부터 제명 처분을 받자, 활동가가 대거 탈당하여 독자적인 전위조직을 지향하며 만든 조직이다. 사회당계 활동가들도 1961년 기존의 사회당원협의회를 넘어서서 조합 내 정파조직으로서 성격을 분명히 하여 <동지회>를 결성하였다.

<나가사키조선분회>는 “반합리화투쟁은 자본의 일체의 착취에 저항하는 투쟁”이라고 규정하고, “총자본 대 총노동의 투쟁이라고 하는 입장에서 전조선기계, 4노협, 지부 주체의 공투체제의 강화”를 도모하였다. 이처럼 <나가사키조선분회>는 <삼릉조선지부> 대회가 개최되기 직전에 다수 조합원의 지지를 얻어 쟁의권을 확립하고 합리화에 전면적으로 대결하는 자세를 취하였다. 이에 따라 <삼릉조선지부> 대회에서 합리화에 대한 대응방침을 둘러싸고 격렬한 대립이 예정되어 있었다. 결국 <삼릉조선지부> 대회에서 <쇄동>계 집행부가 제안한 원안에 대하여 <사연>, <공산당>계는 반대하고, <동지회>도 결국은 반대로 돌아섰다. 이에 따라 ‘합리화의 전면철회’를 기조로 하는 새로운 수정안이 가결되었다. 이는 기업단위 노동조합의 통합을 둘러싼 노선 차이와 더불어 노사관계 재편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나중에 새로이 설립된 ‘제2조합’인 <삼릉중공나가사키조선노동조합>의 ‘소화(昭和)41년도운동방침(안)’(1965년 12월7일)을 보면 ‘사전협의’와 ‘근로조건의 향상’을 전제로 합리화에 대해서 협력할 의지가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즉, “전조선기계, 삼릉지부는 합리화에 대해서 전면 반대의 태도를 취하고 있는데, 이는 잘못이고 국가경제 및 기업발전을 위하여 필요한 합리화에는 협력한다”는 것과, “구체적으로는 ①합리화 문제에 관한 사전협의, ②합리화가 노동 제 조건의 유지향상으로 이어지는가 여부로 판단한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5. 제2조합의 설립과 노사관계의 재편 

1964년 6월1일 3사가 합병되어 <삼릉중공업주식회사(三菱重工業株式?社)>가 발족되었고, 이를 계기로 노동조합의 조직통합이 추진된다. 먼저 본사만 통일이 시도되어 <삼릉중공업 본사노동조합>이 결성되었다. 이리하여 4개의 노동조합조직이 하나의 회사에 존재하게 되었는데, 조직통일을 위한 준비단계로 1965년 2월에 <삼릉중공 4노조협의회>가 발족되고 같은 해 7월에는 조직통일준비위원회를 구성할 것이 제안되었다. 그런데 기업수준의 조직통합을 둘러싸고 <삼릉조선지부>와 <신삼릉중공노동조합>의 노선이 특히 대립되었다. <삼릉조선지부>는 3사 노조를 당분간 존속시키고 결정권을 갖지 않는 ‘연락협의회’ 구성을 추진하였는데, <신삼릉중공노동조합>은 통일처리권을 갖는 ‘중앙교섭단’을 추진하였다. <삼릉일본중공노동조합연합회>는 기업수준 조합의 독자성을 중시한다는 점에서는 <신삼릉중공노동조합>에 보다 가까운 입장이었다. 

<나가사키조선분회>는 1965년 1월30일부터 2월1일까지 열린 제13회 분회대의원대회에서 기업 수준의 노동조합연합체를 결성하는 방안에 대하여 거리를 두고, “①전조선, 지부, 분회의 주체성을 명확하게 하고, 타 노조와 일치점을 찾아내서 공투에 노력을 기울인다. ②타 노조와의 사이에는 불신감이나 의문이 있기 때문에 이를 해소하기 위하여 상호 이해를 다지기 위한 교류를 행한다. ③조직문제의 검토는 대중적인 토의와 납득을 얻어서 진행한다”고 결정하였다. 또, 1965년 춘투에서 당시 <삼릉조선지부>의 <쇄동>계 신집행부가 기업련 중심의 경향을 드러내고 <전조선기계>의 산업별 공투와는 거리를 두게 되자, <전조선기계> 중앙위원회에서는 “미쓰비시에서 나타났듯이 기업련 중심의 투쟁은 산업별 통일투쟁을 방해하고 타결액을 낮춘다”고 비판하기도 하였다.

결국, 1965년 9월의 <삼릉조선지부> 제32회 대회는 “①운동기조로서는 산별(전조선기계)을 강화하고 그 입장에 서서 운동을 전개한다. ②합리화문제에 관해서는 쟁의권 확립을 배경으로 전면 철회를 기조로 하는 방침으로 임한다. ③조직통일에 관해서는 4노협 노선은 노사협조로 규정하고 조직통일을 위한 준비위원회 설립을 부정하고 공투의 존재방식·조직통일에 관해서 재고한다”고 결정하였다. 이는 과거 1년간에 걸쳐서 전개되어 온 <쇄동>계 집행부의 ‘신노선’이 전면적으로 부정되는 것을 의미했다. 이 대회의 결정을 계기로 노동조합의 분열이 현실화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삼릉조선지부>에서 <삼릉중공업> 차원의 기업별 노조로의 통합을 부정한 것이 <쇄동>계에서 제2조합의 결성, 즉 노동조합의 분열을 추진할 수 있었던 중요한 명분이 되었다.

<나가사키조선분회>의 <쇄동>계 간부들은 <미이케(三池) 신노조>와의 간담회를 열어 그 체험을 배우고, 신조합의 규약 및 운동방침의 인쇄를 <미이케 신노조>의 도움을 받아서 수행하기로 하였다. 마침내 1965년 12월7일 <나가사키조선분회>가 분열되어 제2조합인 <삼릉중공나가사키조선노동조합>이 결성되었다. 제2조합은 결성취지서에서 “투쟁지상주의, 계급투쟁 일변도의 전조선기계 삼릉지부와 결별한다”고 밝혔다. 제2조합이 결성된 지 2주 만에 과반수의 조합원이 <나가사키조선분회>를 탈퇴하였다. 대세를 따라 “직장이 쪼개져서는 안 된다”는 논리하에서, 직제를 중심으로 직장을 단위로 한 제2노조로의 일괄가입이 이루어졌다. 이후 다른 사업장 분회에서도 분열과 탈퇴가 잇달았고, 결국 1966년 11월 <삼릉중공노동조합연합회>가 발족하고 이어서 1968년 12월 단일조합으로 이행하면서 <동맹>에 가맹하여 <동맹삼릉중공노동조합>이 출범하였다. 

6. 맺음말

지금까지 1950년대 중반 이후 1960년대 중반에 이르는 노사관계의 재편과정을 <미쓰비시중공업 나가사키조선소>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이 과정은 바로 기업별노동조합체제와 협조적 노사관계라는 일본적 노사관계의 토대가 만들어지는 과정이기도 하였다. 1950년대 이후 일본에서 노사관계의 재편은, 시기별로는 차이가 있지만 조선산업뿐 아니라 대부분의 산업과 기업에서 발생하였다. 철강·자동차·전기·전력 산업 등에서는 1950~63년에 이러한 변화가 발생하였으며, 조선·화학·종이 펄프·금속기계 분야에서는 1964~74년에 이러한 변화가 발생하였다. 이러한 재편과정은 민간부문에서 <사회당-총평> 블록에 대해서 <민사당-동맹> 블록이 우위를 얻고, 나아가서는 <IMF-JC>로 대표되는 ‘기업주의적’인 노선이 헤게모니를 확보하게 되는 과정이었다. 이를 통해서 비로소 ‘일본적 노사관계’와 ‘기업사회’가 만들어졌던 것이다.

머리글에서 살펴본 바 있듯이 ‘일본적 노사관계’가 다양한 문제점을 안고 있다면, 이 시기 일본의 노동운동에 다른 선택지는 없었던 것일까? 1964년 춘투에서 <삼릉조선지부>가 패배하게 된 데는, 비록 산업별 임금사상과 정책에 대한 지향은 있었지만 조합원들이 공유할 수 있는 구체적인 임금정책을 갖추고 있지는 못했다는 점을 주요 원인으로 지적할 수 있다. 이로 인해서 기업합병을 계기로 한 본급통일의 필요성에 입각한 경영자의 ‘기업 내적 임금정책’이 현실적 설득력을 지녔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경향은 일본 자동차산업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발견되는데, 이는 일본의 노동조합운동이 기업 횡단적 노동시장에 대한 규제경험과 전통이 미약했던 역사적 한계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또, <나가사키조선소>에서 ‘제2조합’이 결성된 직후 대다수 조합원이 제2조합으로 이탈하게 된 현상은, 경영자의 압력과 부당노동행위가 있었다고는 해도 조합원의 의식과 활동력이 높은 수준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즉, 그동안 외견상 활발한 활동을 보였던 <나가사키조선분회>에서도 노동조합 내 정파조직에 의한 일련의 결정이 조합원 대중의 요구와 괴리된 채 정파 간의 갈등과 타협의 논리에 영향을 받아서 진행되어 왔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나가사키조선분회>에 대해서는 사후에 “극히 독선적인 집행부와 거기에 맹목적으로 추종해 온 비판력을 상실한 조합원 대중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하는 가혹한 비판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결국 노사관계의 재편과정은 경영 측의 의지와 논리가 관철되는 과정이었다. 1965년의 노무관리지침을 보면 경영 측은 ‘감독자층의 강화’, ‘직장투쟁대책의 추진’, ‘과공장의 체질개선’ 등을 추진하고, 과공장의 체질개선을 위하여 ‘종업원의 사상적 분류’, ‘건전세력의 신장도모’, ‘좌파에 대한 개별대책 추진’ 등을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지침을 통해서 제2조합의 결성과 노사관계 재편이 준비되었던 것이다. 제2조합의 결성과정에서 <쇄동(刷同)>이라는 비공식 그룹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음을 이미 보았는데, 이러한 비공식 그룹은 그 이후 기업주의적이고 협조적인 노사관계가 정착되고 안정화되는 과정에서도 계속 큰 역할을 하였다.

지금까지 살펴본 <미쓰비시중공업>의 노사관계 재편을 계기로 조선산업 노동운동에서 <전조선>계가 소수파로, <조선총련>계열이 다수파를 이루는 구도가 확립되었다. 일본 조선산업에서 노사협조주의에 입각한 노사관계가 확립되는 과정은, 1950년대 후반 이후의 노자 간의 격렬한 갈등과 투쟁, 그리고 이와 관련된 노동조합 내부의 정파 간의 대립과 투쟁을 거쳐서 비로소 가능했다. 나아가 일본 조선산업의 고능률 대량생산체제는 바로 기존의 대립적 노사관계를 협력적 노사관계로 재편하는 과정과 함께 진행되었고, 이는 노사협조주의를 내세운 운동노선이 주도권을 확립해가는 과정이기도 하였다.

1987년 이후의 한국의 노동조합운동을 1960년대 전후의 일본과 비교하면 몇 가지 차이점이 있다. 먼저, 한국의 노동운동 내에서는 공산당, 신좌익, 사회당, 민사당 등의 정치적 분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1987년 이전까지 한국에서는 냉전과 반공이데올로기 아래서 자율적인 노동조합운동조차 보장되지 않았다. 이로 인해서 정치적 노동운동의 성장이 매우 낙후된 구조를 보이고 있다. 진보정당을 지지하는 조합원의 비율은 여전히 소수이고, 이 점은 현재 민주노총의 공식적인 정당지지 방침을 감안하면 노동조합 조직의 불안정 요인이 될 수 있다. 둘째로, 현재 산업별 노동조합 조직으로의 재편이 꾸준히 추진되어 왔고, 현대자동차 등 주요 대기업노조가 산별전환을 결의하는 성과를 거두고 있다. 하지만 노동조합운동이 기업횡단적 노동시장을 규제해 본 역사적 전통은 일본보다도 훨씬 미약하고, 여전히 기업별 노동조합주의의 경향은 강력하게 남아 있다. 

현대, 대우, 삼성 등 한국의 조선 대기업 가운데는 산별노조로의 조직형태 전환에 성공한 사례가 아직까지 없다. 이는 일부 노동조합이 산별형태로 전환하더라도 상당한 기간 동안 산업별 노동조합과 기업별 노동조합의 산업별 연맹이 공존하게 될 가능성이 클 것임을 시사한다. 셋째로, 생산성 향상 운동과 합리화에 대한 노동조합의 방침은 자본주의 시장경제와 고용관계 내에서 노동조합의 존재방식 자체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한국의 경우 노동운동 내부에서 이러한 측면에 관한 진지한 노선 논쟁 자체가 생략된 채, 1960~70년대 국가 주도의 경제성장 정책에 동원되어 온 역사가 있다. 이후 이러한 쟁점을 둘러싼 노동조합운동의 역사와 정책에 관한 연구와 검토가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 제작년도 :
  • 통권 : 제130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