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의 설렘으로 돌아보는 기륭전자 비정규투쟁 1000일

노동사회

처음의 설렘으로 돌아보는 기륭전자 비정규투쟁 1000일

편집국 0 4,247 2013.05.29 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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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5년 7월9일 기륭전자분회의 첫 임시총회 모습.  ▶ 기륭전자분회 ]

2008년 7월5일, 천일을 넘게 투쟁해온 우리 기륭전자 분회 조합원들이 이제 기나긴 투쟁의 끝장을 보자며 단식농성을 시작한 지 25일차를 맞는 날이다. 계속된 장마로 후덥지근한 날들이 이어지더니 비가 주룩주룩 내린다. 회사 앞에 쳐놓은 천막과 옥상 위 단식농성장이 눅눅해지는데 이놈의 비는 자꾸 눈치 없이 내린다. 앙상한 몸으로 흰옷을 입고 누워 있는 단식자들의 얼굴이 퀭하다.

단식 25일차 속에 맞는 분회 결성 3주년 

10명의 조합원이 시작한 단식농성은 이제 6명이 남았다. 이미 1047일째 맞고 있는 투쟁으로 피로도가 많이 누적되어 있고, 지난 5~6월 동안 1차 시청 앞 조명탑 고공농성, 기륭 앞 천일집중투쟁 기간, 2차 구로역 앞 CCTV 철탑 고공농성 등을 전개하며 숨 가쁘게 달려와 지칠 대로 지친 상태로 단식농성에 돌입한 것이었다.

두 달 동안 거의 제대로 잠도 못 자고 매일 같이 집도 못 들어가고 노숙투쟁 등을 전개해 몸 상태가 엉망인데, 그 몸으로 단식을 들어갔으니 오죽 하겠는가. 하지만 조합원들은 쓰러져 가면서도 필사적으로 버티고 있다. 이 투쟁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자신의 몸을 조금씩 태워가며 단식농성을 이어간다.

오늘은 2008년 7월5일! 분회 결성 3주년이 되는 날이다! 작년 이날에도 우린 회사 앞에서 많은 연대동지들을 모시고 분회 결성 2주년 행사를 힘차게 했었다. 그날은 매우 화창한 날이었다. 예쁜 노란 풍선들에 우리의 소원을 적어 하늘을 향해 철문 위로 날려 보내면서, 내년에는 거리에서가 아닌 일터에 돌아가 축배를 들자고 함박웃음을 지었었지. 철문에 하얀 락카로 이런 문구를 적었다. 
“이곳은 우리가 돌아가야 할 일터 기륭전자입니다.” 
그곳에서 다 같이 기념사진을 찍어 우리들의 지갑 속엔 아직도 그날의 사진이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일 년이 지난 오늘, 우린 공장 앞의 거리에서 습기로 눅눅해진 천막에 누워 하염없이 내리는 비를 보고 있다.

3년 전 그날 정말 많은 사람들이 한순간에 노동조합 가입 원서를 작성했었다. 아무도 사람과 사람 간의 관계가 거의 파탄 나 있던 기륭전자에서 이렇게 큰 성과를 거둘 수 있으리라 기대하지 않았다. 100명만 넘어도 대성공일거라 생각했는데 200명 가까운 조합원이 노조에 가입을 했고, 현장 아줌마들은 이제 노동조합이 생겼으니 우리도 잘리지 않고 사람답게 살 수 있을 거라며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그동안 당했던 서러운 차별과 억울함이 복받쳐 올라, 이제 우리도 사람답게 한번 살아보자며 서로를 부둥켜안고 위로했었고, 많은 지역동지들이 달려와 축하인사를 날렸었다. 이렇게 많은 조합원이 가입했으니 다 잘 될 것이라고 희망과 기쁨이 가득했었다. 정말 다 잘 될 것만 같았다. 행복감만이 가득했던 그때로, 다시 3년 전 그날로 돌아가 보자.        
                        
젠장 맞을 이놈의 회사, 문자해고까지!

2005년 7월5일, 너무 떨려서 한잠도 이룰 수 없었다. 새벽까지 뒤척이다가 더 이상 자는 것을 포기하고 일찍 출근 준비를 하고 청량리역으로 가 전철을 탔다. 청량리역에서 가산디지털단지역까지 워낙 장거리 출퇴근을 하는지라 가면서 자는 것밖에 시간을 때울 방도가 없었는데 오늘 아침은 전철 안에서도 잠을 잘 수가 없다. 자꾸 핸드폰만 꺼내서 체크를 하게 된다. 오늘은 내가 다니는 직장 기륭전자에 노동조합이 결성되는 운명의 날이다!

나는 올해 2월에 기륭전자에 입사했다. 내 나이 22살. 전에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잠깐 쉬고 있었는데, 나보다 3일 먼저 기륭전자에 입사한 중학교적 친구가 같이 다니자고 제안을 해서 인터넷에서 그 친구가 알려준 취업 사이트로 들어가 ‘기륭전자’라고 올라온 구인광고를 보고 그 밑에 적힌 파견업체로 전화를 했다. 사무실로 방문해 이력서를 내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파견업체에서 태워주는 봉고차에 실려 기륭전자로 가게 되었다. 전에 다니던 회사에서도 파견직이었기 때문에 이런 것들은 익숙하다. 기륭전자 2층 휴게실에서 박동준 총무부장과 면접을 보고 과장에게 넘겨진 후, 기륭전자 작업복과 기륭전자라 적힌 사원카드를 받고 다시 반장에게 넘겨져서 생산현장으로 투입되게 되었다. 

나는 2층 MBCO란 부서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다행히 나보다 3일 먼저 입사한 친구들과 같은 부서로 배정받았다. 그런데 참 이상한 것은 많은 사람들이 일하고 있는 현장에서 신입사원들이 수십 명이나 들어오는데도 아무도 거들떠도 보지 않는 것이었다. 보통 다른 회사들 같으면 한 명만 입사해도 기존에 일하던 동료들이 반갑다고 인사를 하거나 앞으로 잘 지내자고 손을 내밀 법도 한데 그런 사람이 단 한명도 없다. 다들 곁눈질로 한 번 슬쩍 본 후 다시 고개를 숙이고 묵묵히 일을 한다. 분위기가 싸하다. 아무래도 이 회사는 정이 안 갈 것 같은 예감이 든다.

며칠 시간이 지나면서 그런 예감은 더욱 확실해진다. 일하는 것 자체는 별로 힘들지 않지만 같이 일하는 사람들은 무슨 말을 시켜도 제대로 눈길도 주지 않고, 관리자들이나 수리기사 녀석들도 목에 어찌나 힘을 주고 다니는지 아침 출근길에 인사를 해도 인사도 안 받고 지나치기 일쑤다. 젠장 맞을! 잘난 것도 없는 것들이 웃기고 있네. 친구들과 같이 들어왔기에 망정이지 그것도 아니었다면 이렇게 인정머리 없는 회사 다니기 정말 힘들 것 같다. 

emchoi_03.jpg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이 회사에 대해 파악해 간다. 이 회사는 정규직, 계약직, 그리고 대다수인 파견직들이 섞여 일을 한다. 똑같은 일을 하고 똑같이 정규직 관리자들에게 지시를 받고 똑같은 작업복에 사원카드도 들고 다니지만, 정규직과 계약직은 사원카드에 사진과 이름이 적혀 있고 우리 같은 파견직은 사진도 없이 번호만 적혀 있다. 이런 젠장 맞을! 우리가 죄수란 말인가, 번호로 불리게! 쉬는 시간에 화장실을 다녀오거나 점심시간에 식사를 하고 올 때 작업장 문이 닫혀 있으면 사원카드를 찍어도 문이 열리지 않아서 정규직이나 계약직이 와서 카드로 문을 열어줄 때까지 서서 기다릴 때도 많다. 또 다른 차이점은 정규직은 상여금이 700%고 계약직은 400%, 우리 같은 파견직은 0%라는 점이다. 0%! 

이미 기륭전자에서 정규직 전환은 안 해준지 오래고, 관리자에게 잘 보이면 계약직을 시켜준단다. 그래서 다들 관리자에게 잘 보여 계약직이 되려고 혈안이 되어 있다. 그래서 일부 골빈 사람들은 관리자에게 커피 뽑아다 바치고 먹을 것 사다 바치고 난리가 아니다. 별것도 아닌 기륭 같은 작은 회사에서 미쳤다, 정말! 시간이 지나면서 알게 된 또 다른 사실은 관리자에게 밉보이거나 잔업, 특근을 거부하면 문자메시지로 해고를 한다는 것이다! 친구의 말을 듣기 전까지 나는 사람이 자꾸 없어지길래 이직률이 높은 건 줄만 알았다.

“은미야, 너 그거 알아? 여기는 사람도 문자로 자른댄다. 이런 회사 진짜 못 다니겠다.”
“뭐? 설마, 그렇게 까지 하려구…….”
“어제 우리랑 같이 9시까지 잔업하고 퇴근한 아줌마들 중 여러 명에게 문자가 갔대. ‘내일부터 출근하지 마시오’라고. 그런데 한 아줌마만 문자를 못 받고 오늘 아침 출근을 한 거야. 싸가지 없는 조장이 ‘나오지 말랬는데 왜 나왔어요?’라고 했고, 아무것도 모르고 출근했던 그 아줌마는 대성통곡을 하고 울면서 갔어. 진짜 어떻게 이럴 수가 있냐?!” 

그래도, 나만은 잘리지 않겠지……

아, 그랬구나! 그래서 그렇게 동료들이 신입사원들이 들어와도 아는 척도 안 하고 눈길 한 번 안 주고 쌀쌀맞게 굴었구나! 만날 그렇게 앞에서 사람을 뽑고 뒤로 자르니 새로 들어온 사원들이 반가울 수가 있겠나. 새로 들어온 사람 수만큼 우리들 중 누군가가 잘린다는 건데 당연한 거겠지. 그 이후로도 계속해서 신입사원들은 들어왔고 오늘까지 옆에서 일했던 사람이 다음날 아침 출근하지 않으면 모두들 말하지 않고도 알 수 있었다. ‘아, 또 잘렸구나.’ 그리고 다들 침묵으로 넘기는 거다. 

이젠 나 역시 기존 사원들이 그랬던 것처럼 신입사원들이 들어오면 한번 쳐다보고는, ‘이제 또 누구를 자르려나’ 생각하며 다시 하던 일을 묵묵히 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모두들 그런 상황에 익숙해 져가며 잘리지 않기 위해 잔업특근을 죽어라 했다. 매일 밤 9시, 10시까지. 주말에도 특근은 계속 있었고,  한 달 내내 쉬는 날은 거의 없었다. 이렇게 해서 받는 월급은 100만원도 채 되지 않았다. 하지만 다른 회사 가도 거의 비슷비슷 하니까 그냥 다니는 수밖에 없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나만은 잘리지 않겠지’, ‘내 친구들만은 잘리지 않겠지!’ 이기적일수도 있고 비겁할 수도 있는 생각이지만, 다들 이런 생각으로 버티며 일할 수 있는 거겠지.

그런데 청천벽력 같은 소식! 첫 월급을 타던 날 내 친구들이 문자메시지로 해고를 당했다. 아무 잘못도 없이 잘린 친구들을 보며 정말 화가 난다. 어찌 이럴 수 있단 말인가? 그동안 억울하게 잘린 사람들도 모자라 정말 해도 너무한다. 친구들은 어차피 기륭 같은 회사에서 일하고 싶지도 않았다며 항의하는 것조차 포기해버렸다. 나 역시 너무 분해서 당장 때려치우고 싶지만 다른 회사 알아보러 다니는 것도 귀찮고 당장은 뾰족한 수가 생기기 전까지 그냥 다니고 싶다. 여전히 ‘나만은 잘리지 않겠지’란 생각이 가득한 것일까?

“은미야, 너 나랑 노조 한 번 만들어 보지 않을래?”

그리고 두 달 후. 나랑 입사동기인, 그래서 가끔 복도나 탈의실, 휴게실에서 만나면 반갑게 대해주고 먹을 것도 챙겨주며 잘해주었던 종희 언니와 석순 언니도 문자메시지로 해고를 당했다고 한다. 너무 억울해서 맞대응할 거라는 언니들을 보며 힘내라고 “빠샤!”를 외쳤지만 정말 너무 화가 난다. 이 회사가 갈 데까지 가는구나!

파견회사 사무실을 찾아가 거세게 항의한 언니들이 알게 된 해고사유는 ‘잡담’이라고 한다. 파견회사는 해고할 아무런 권한도 가지고 있지 못한다고 한다. 기륭전자에서 현장 조·반장들이 맘에 안 드는 사원이 있음 명단을 작성해 생산과장에게 올리고, 과장이 총무과에 그것을 제출하면 총무과에서는 파견회사 사무실에 팩스로 ‘해고자 명단’을 넣어준다. 그럼 파견회사는 그것을 휴대폰 전화나 문자메세지롤 통보를 해줄 뿐이라고 한다. 기가 차서 말도 안 나온다. 뼈 빠지게 일한 사람들을 이렇게 함부로 대하고 자르다니, 기륭전자 같은 회사는 한 번 혼나봐야지 정신을 차리려나 싶다. 

그러다가 같은 부서에서 관리자로 일하던 화숙 언니랑 얘기를 해봤다. 이런 식으로 사람을 함부로 자르다가는 언젠가 기륭전자도 큰 코 다칠 것이라고, 이런 회사는 노동조합이 한 번 생겨봐야 정신을 차릴 거라고 얘기했다. 언니 역시 맞다고 끄덕여준다. 철없는 내가 우리 같은 파견직들은 아무 힘이 없다며 조금 더 강자인 정규직들이 먼저 나서야 하는 것 아니냐고 하자 언니는 이것은 누구 하나의 문제가 아니라며 정규직, 계약직, 파견직 모두가 다 함께 뭉쳐 힘을 합쳐야 된다고 한다. 그리고 한 달 후.

나는 2층 MBCO 부서에서 NICE 부서로 옮겨져 일을 하게 되었고, 신규아이템 사업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매일 밤 10시 11시까지 일하는 건 기본이고 철야도 밥 먹듯이 했다. 거의 기절 직전까지 일했지만 그렇게 혹독하게 일해 받은 돈은 고작 110만 원이다. 대표이사는 이렇게 뼈 빠지게 일한 생산직 직원들은 나 몰라라 하고 연구소 직원들만 데리고 수고 많았다고 회식을 시켜줬다고 한다. 이번 승진도 연구소만 다 시켜줬다고 하는데, 생산직 정규직 관리자들은 밸도 없는지 항의 한 번 제대로 못 한다. 말로만 회사가 생산직만 차별한다고, 우리 회사도 노조가 생겨야 한다고 큰소리치지! 막상 노동조합이 생기면 제일 먼저 구사대로 뛸 한심한 족속들이다! 하여간 남자들이란……, 쯧쯧쯧. 어쨌든 요즘 한 달간은 해고가 없어 살만하다! 일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관리자인 화숙 언니가 나에게 복도로 따라 나오라고 한다. 

‘왜 그러지? 내가 뭐 잘못했나? 나 잘못한 거 없는데…….’하고 생각하며 따라 나섰다. 화숙 언니는 대체 어떤 생각으로 나를 불러낸 걸까? 언니는 내가 일하는 2층에서 유티란 직책으로 라인을 관리하는 일을 맡고 있다. 보통 키에 약간 마른 체형인 언니는 아주 선한 인상에 동그란 얼굴에 크고 순한 눈을 가지고 있다. 화숙 언니는 같이 일하는 아줌마들 사이에서 평판이 아주 좋다. 사람들을 함부로 대하는 싸가지 없는 다른 관리자들과는 달리 언제나 묵묵히 일을 하고 사람들에게 예의바르게 존중하며 대하기 때문이다. 난 그런 언니에게 남다른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복도에서 따라 나서 언니의 얼굴을 쳐다보며, “왜요, 언니?”하고 어렵게 내뱉었다. 언니는 대뜸 “은미야, 너 나랑 노조 한 번 만들어 보지 않을래?”라고 한다! 올 것이 왔구나! ‘그래, 이런 회사는 한번 노조 생겨서 된통 혼나봐야 돼’란 생각이 선뜻 든다. 

“좋아요, 언니! 만들어보겠어요!” 
망설임 없는 나의 대답을 듣고 언니는 웃으며 다시 말한다.
“좋아. 그럼 이번 토요일에 나와 함께 갈 데가 있어.”
“알았어요. 언니.”
“이번 토요일 날 퇴근 후에 다시 연락 할게. 전화 꼭 받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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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륭전자분회가 결성된 지 3년이 훌쩍 지났지만 투쟁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지난 7월10일 기륭전자 공장 앞에서 열린 '기륭분회 투쟁승리를 위한 금속노조 결의대회' 모습.  ▶ 금속노조 ]

수많은 이야기가 쏟아진 두근거림과 희망의 첫 모임

한 주가 얼마나 길게 갔는지 모른다. 나는 언니를 믿고, 또 뜻을 함께 하고 있을 다른 동료들을 믿으며 그렇게 한 주를 기다렸다. 토요일에 일을 마치고 화숙 언니를 따라 광명의 한 식당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함께 노동조합 결성 준비를 하던 동료 20~30명가량을 만날 수 있었다. 현장에서 자주 보던 아줌마들과 언니들, 그리고 얼마 전 ‘잡담’이란 이유로 말도 안 되게 해고당한 종희 언니와 석순 언니도 있었다.
그리고 또 난 그날 처음으로 나중에 분회장을 맡게 될 김소연 언니를 만나게 되었다. 물론 2층 옆에 A/S부서에서 유티직을 맡고 있어 지나치듯이 본 적은 몇 번 있었다. 동그란 얼굴에 순한 눈매를 가진 화숙 언니와 달리, 갸름한 얼굴에 날카로운 눈매를 가졌고 안경을 낀 소연 언니는 현장에서 항상 당차고 활기찬 모습을 보여주고, 때로는 동생들에겐 따끔한 맏이도 되고 아줌마들에겐 예의바른 존중을 보여주고 윗사람들에겐 때론 입바른 소리도 직설적으로 쏟아 부을 줄 아는, 믿음이 가는 사람이었다. 언제나 자애로워 보이는 화숙 언니와는 또 달리 대차면서도 씩씩한 모습으로 현장 동료들에게 큰 신임을 얻고 있는 소연 언니였다.

그날 알게 된 얘기지만 기륭전자도 비정규직을 쓰기 전까지는 현장 분위기가 아주 좋았다고 한다. 그런데 2002년부터 파견노동자들을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이렇게 되었다고 한다. 그렇게 성격 좋은 소연 언니도 회사 들어 온 첫 날, 아무도 같이 밥 먹자는 소리를 안 해서 점심도 못 먹었다고 했다.

그날 식당에서 소연 언니는 내가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기륭전자의 큰 문제점들을 알려주었다. 회사가 우리를 파견으로 고용한 것이 불법이라는 것! 우리가 그동안 그렇게 잘릴까봐 노심초사하고 눈치를 봐야 했던 것이, 모두 회사의 불법이었다니 정말 놀라운 일이다. 오히려 불법파견을 저지른 건 회사였는데 그동안 왜 우리가 죄인처럼 눈치를 보고 살았는지 모르겠다. 언니의 얘기를 들으면서 우리가 노동조합을 결성하려는 것이 정당한 것이란 확신이 더욱 든다. 

또 하나는 정규직, 계약직들도 회사에 불만이 많다는 것이다. 기륭전자의 생산직 사원 300명중 정규직은 단 10명뿐이었지만 회사는 이마저도 많다고 정규직이 스스로 나가떨어지게 하기 위해 하루가 멀다 하고 갖은 구박을 하고 있다고 한다. 정규직 사원들에게 자리도 주지 않고 이 부서 저 부서로 뺑뺑이를 돌리고, 소극적이고 말주변 없는 사람에겐 강제로 사람들을 관리하라고 유티직을 시키는 등, 그런 식으로 괴롭혀서 10명뿐인 정규직 중에 벌써 두 명이 못 견디고 사직서를 썼다고 한다.

게다가 근속 10년차 정규직 여사원이 출산휴가를 쓰려고 하자 사직서 쓰고 애 낳고 다시 계약직으로 입사를 하라고 했다고 한다. 이분께서 그럴 수 없다고 버티자 이후 계약직 여사원들마저 출산휴가를 쓸까 두려워, ‘아줌마는 1년, 아가씨는 6개월, 새댁은 3개월’ 이런 식으로 재계약을 한다고 한다. 늘 1년씩 재계약을 하던 사람들은 분노로 부글부글 끓고 있고, 3개월 재계약을 한 분은 모멸감을 느껴 스스로 뛰쳐나갔다고 한다. 그날 식당에서 호프집으로 옮겨 밤늦은 시간까지 우린 많은 이야기를 했다.

회사가 불법파견을 저지른 것이니 판정만 난다면 우린 100% 승리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이미 회사의 어처구니없는 행동들로 인해 정규직, 계약직들마저 분노로 끓고 있다는 것! 누구 하나가 총대를 메고 나서주기만 한다면, 이미 끓고 있는 분노는 폭발해 큰 힘을 발휘할 것이란 희망적인 이야기였다.

파견직들만 싸우게 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정규직, 계약직, 파견직이 모두 하나로 모여 큰 힘으로 뭉쳐야 한다고 언니들은 거듭 강조했고, 난 그 속에서 두근거림과 함께 희망을 느낄 수 있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경험하는 일들. 그리고 생소한 이야기들. 그렇게 그날 밤은 많은 이야기들로 길게 이어지고 있었다.

두렵지만 신나는 준비기를 거쳐, 결전의 날이 밝다! 

그날 이후 결전의 날까지 약 한 달간의 준비기간이 있었다. 그 시간들은 내가 기륭전자에 입사해, 아니 사회에 나와 가장 행복감을 느꼈던 시간들이었다. 내가 그 속에서 가장 큰 믿음을 갖고 따라갈 수 있었던 건 화숙 언니와 소연 언니 두 분 덕분이었다. 그리고 언제나 신랄한 독설로 기륭전자가 얼마나 악덕회사인지 비정규직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 열변을 토해주었던 종희 언니와 석순 언니! 두 분의 거친 입담은 언제나 통쾌함을 느끼게 해주었다. 그렇게 행복한 시간들은 계속 이어졌다.

매일같이 퇴근시간이 되면 회사 몰래 지역 노동조합 사무실에 가 언니들과 함께 교육도 받고 자료도 만드는 등, 늦게까지 준비를 했지만 피곤한 줄도 모르고 신나서 했다. 산별노조가 무엇인지 노동조합 결성이 왜 필요한지 기본적인 공부도 했다. 우리는 4만의 조합원을 가진 가장 힘이 센 금속노조에 가입하게 될 것이며 분회로 들어가게 된다고 한다. 노동조합 결성 후 회사가 어떤 탄압을 가할지 미리 배우며 마음을 다지고 투쟁가도 배웠다. “80년대 노래 같다”며 킥킥 거리기도 하고, 설마 회사가 이렇게 유치하게 나올까 상상해보기도 했다. 우리보다 먼저 비정규 투쟁을 했던 한국통신 노동조합이나 캐리어 사내하청 노조의 투쟁 영상을 보며 크게 겁을 집어먹은 난 이렇게 말했었다.

“언니, 전 저런 거 못해요. 그냥 조합원으로 따라갈 순 있지만 저렇게 길에서 투쟁하고 그런 건 절대 못해요.”
석순 언니는 그런 날 보고 웃으면서 짓궂은 농담을 했다.
“너도 다 닥치면 하게 돼 있어. 말 나온 김에 우리 사장 집 앞에 가서 천막 농성이나 해볼까?”
“싫어요! 그런 건 절대 싫거든요!”
그렇게 시간은 갔고 오늘 드디어 결전의 날이다.

그렇게 우리는 쉬는 시간 십 분 만에 모두 하나가 됐다

emchoi_04.jpg지난 일들을 생각하며 멍하니 있다 보니, 어느새 전철은 가산디지털단지역에 도착했다. 휴대폰 문자소리에 확인을 해보니 석순 언니의 문자다. 

“다들 한숨도 못 주무셨죠? 우리의 떨림은 두려움이 아니라 설렘입니다!” 
함께 준비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단체로 보낸 문자인가 보다. 많은 사람들 틈을 지나 전철을 내려 마을버스 3번을 타고 기륭전자 앞에 내렸다. 언제나 보이는 풍경처럼 기륭전자 정문에 사원들이 줄을 서서 출근카드를 찍고 들어가고 있다. 나도 그 뒤에 줄을 섰다. 출근카드를 찍고 탈의실로 가던 중 같이 분회결성 준비를 하던 한 언니를 만났다. 

“은미야, 안녕. 잘 잤어?”
“아니, 잘 못 잤어. 떨려서 한숨도 잘 수가 있어야지. 언니는 잘 잤어?”
“나두 그래. 오늘 알지? 10시에 모이는 거? 사람들에게 다 전달해야 돼.” 
“응. 알아. 있다 보자. 언니.”

탈의실에 가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내가 일하는 2층 NICE로 들어가 자리에 앉는다. 사람들은 이미 라인에 앉아 일을 할 준비를 하고 있고 반장은 책상에 앉아 컴퓨터만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다. 이때다 싶어 앞의 아줌마를 쿡쿡 찌르면서 말을 한다.

“아줌마, 오늘 10시 쉬는 시간에 2층 옆 A/S 라인에 모여 다 같이 해야 할 일이 있어요. 정말 정말 중요한 거예요. 전 사원이 한 명도 빠짐없이 다 모일 거니까, 꼭 오셔야 해요. 그리고 이 얘기 앞사람에게도 전달해주세요.”

역시 학창시절에 써먹던 방법이 딱이다! 쪽지에 적어서 돌릴까도 생각했지만, 그랬다가 그 쪽지가 관리자 녀석들에게 들어갈 위험의 소지가 있어 택한 방법이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이야기는 그렇게 라인에서 일하는 모든 동료들에게 전달되었다. 시간이 지나 드디어 10시 쉬는  시간이 되었다. 종소리가 울려 퍼지고, 난 자리에 일어나서 사람들에게 소리쳤다.

“자, 10시 쉬는 시간입니다. 모두 함께 옆에 A/S 라인으로 이동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10시 쉬는 시간 전 사원이 A/S 라인에 모여 중요한 일을 결정할 것입니다. 시간이 없습니다. 모두 빠르게 이동하도록 하겠습니다. 자, 빨리 일어나서 이동해주세요.” 

사람들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무슨 일이지’ 갸웃거리기도 하고, 우왕좌왕 해가며 A/S 부서로 이동한다. A/S 라인으로 가니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아직 다 못 올라온 1층 사람들이 2층으로 올라오는 소리가 쿵·쿵·쿵 들려온다. 전쟁터에서 긴박한 상황에 지원군이 몰려오는 소리가 이보다 더 크고 반가울까? 

쉬는 시간은 단 십 분! 오늘 내가 이 자리에서 맡은 역할은 혹시 모를 관리자들의 침탈에 대비하여 사람들을 통솔해 폭력사태가 나지 않게 문을 지키는 파수꾼 역할이다. 복도로 나가 보니 많은 사람들이, 우리 부서 사람들이 그랬듯이 무슨 일인지 몰라 두리번거리며 올라오고 있었다. 그 사람들 옆엔 아까 내가 그랬듯이 “시간이 없습니다. 빨리 이동해주세요!”라고 외치며 사람들을 통솔하는 언니들이 있었다. 이제 모두 A/S 라인에 모였다.

각자 자기가 맡은 역할에 따라 나는 문을 굳게 잠그고 지키고, 소연 언니가 라인 위에 올라가 선동을 한다! 또 다른 언니들은 역사적인 순간을 남기기 위해 디카로 사진을 찍고 사람들에게 가입원서와 펜을 나누어 준다. 미처 오지 못한 사람들을 끌고 오는 언니들도 있다. 소연 언니의 힘찬 목소리가 현장 곳곳으로 퍼져 나간다. 기륭전자는 불법파견을 저지르고 있다고 피해자인 우리들은 그동안 너무나도 불안정한 고용 속에서 눈치 보며 비참하게 살아왔다고, 이제는 노동조합에 가입해 사람답게 살아보자고 외친다!

문을 지키면서 소연 언니의 선동을 듣고 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았다. 정신없이 가입원서를 쓰고 있는 사람들, 소연언니의 말을 듣고 있는 사람들의 눈빛이 빛난다. 언니의 힘찬 목소리에서 사람들은 무언가를 느끼고 있는 걸까? 언니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들, 서러웠던 기억들이 복받쳐 올라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렇게 순식간에 많은 사람들이 노동조합에 가입했다.

매 주말마다 문자로 잘려나가는 동료들을 보며, 아파도 휴가 한 번 내지 못하고 눈치 보며 뼈 빠지게 일만했던 파견직 노동자들, 출산휴가를 안 주려는 회사 횡포에 아가씨는 6개월, 새댁은 3개월 단위로 재계약하며 모멸감을 느꼈던 계약직 노동자들, 그리고 생산직 사원 300명 중 10명밖에 안되지만 그마저도 많다고 갖은 구박과 뺑뺑이를 당해야 했던 정규직 노동자들, 그렇게 우린 쉬는 시간 단 십 분 만에 모두 하나가 되었다.

바뀌지 않는 사측의 기만, 그리고 천 일을 함께 한 동지들 

다시, 2008년 7월15일로 돌아온다. 그렇게 꿈만 같았던 노동조합 결성은 사람다운 삶이 아닌 집단해고를 우리에게 안겨주었다. 노동부와 검찰로부터 불법파견 판정을 받은 기륭전자는 500만 원 벌금을 납부하고 죗값 다 치렀다고 한다. 우리는 자기 회사 직원도 아니고 아무 상관없는 사람들이라고 한다. 그해 8월24일 성실교섭 촉구와 해고중단을 외치며 100명이 넘게 시작했던 현장점거 파업은, 해를 세 번이나 넘겨 1000일이 넘도록 끝나지 않고 있다. 그 많던 조합원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생계의 어려움과 가난에 지쳐 눈물을 흘리며 미안하다고 떠나간 조합원들! 또 다시 어딘가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로 눈치를 보며 저임금에 장시간 노동을 하고 있겠지? 

이제 함께 투쟁하고 있는 조합원은 나를 포함해서 열 명이 전부다! 생계를 위해 취업을 나갔지만 아직까지 조합원 신분을 유지하고 있는 분들까지 포함하면 36명 정도 된다. 3년이란 시간 동안 안 해본 투쟁이 없다. 점거농성에 구속, 노숙농성에 삭발, 단식은 2006년과 08년도에 두 번씩이나 하고, 3보1배에 50리 걷기, 고공농성도 두 번씩이나 해봤다. 그간 회사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최대주주가 4차례, 대표이사는 5차례나 변경됐다. 우리가 열심히 투쟁을 해놓으면 문제를 해결하는 게 아니라 도망가는 걸로 대신하기 때문이다.

500명이나 됐던 사원들은 이제 100명도 채 되지 않는다. 생산라인을 기륭전자 사내에서 없애면서 생산직 사원은 전원 계약해지가 됐고, 사무·연구직 노동자들도 희망퇴직 형식으로 구조조정을 당했기 때문이다. 이런 일들을 벌여놓은 것은 현재 기륭전자의 최대주주이자 회장인 최동열과 대표이사 배영훈이다. 이들은 지금까지 기륭을 거쳐 갔던 수많은 경영진들 중 가장 최악의 사기꾼이자 양아치들이다. 문제해결을 할 것처럼 갖은 사기를 쳐서 노사 간의 교섭이 거의 합의직전까지 갔지만, 생뚱맞게 내부사원들의 반발을 핑계 대며 합의내용을 엎어 버렸다.

구조조정을 하고 이미 있는 정규직들도 사직서를 받아 외주화를 시켜도 찍소리 한번 하지 못하고 참아야만 했던 것이 현재 기륭전자에서 일하고 있는 비조합원 노동자들이다. 그런 사람들이 노사문제를 풀려는 대표이사에게 반기를 들며 펄쩍 뛸 용기나 있을까? 설령 있다 해도 구사대로 적극 나서서 여성노동자들의 목을 조르고 머리채를 잡았던 몇몇들이겠지.

현재 경영진들의 전형적인 수법은 상황이 불리해지면 거짓말을 하고, 교섭에 나와서는 약속을 뒤엎는 거다. 그런 사측의 기만적인 거짓말에 맞서 합의직전까지 갔던 교섭내용을 다시 진전시키자며 들어간 단식농성이 35일차를 맞는다. 단식자는 다시 6명에서 4명으로 줄었다. 이미 2006년도에 이어 두 번째 단식이다. 35일째 곡기를 끊고 있는 분회장님, 흥희 언니, 석순 언니, 현주 언니…… 이름만 들어도 눈물 나는, 천일을 함께한 동지들이다. 너무나 힘들고 어려운 투쟁이지만 그럴 때마다 2005년 7월5일, 그 감동의 순간을 떠올려 본다. 

날카로운 첫 만남의 감동은 투쟁 승리와 함께 영원히!   

설령 우리가 승리해 현장으로 돌아간다 해도 그날만큼의 벅찬 감동을 느낄 수 있을까? 아마 아닐 것이다! 그날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설렌다. 노동조합의 ‘노’자도 모르던 22살 순진했던 내가 처음으로 무언가에 푸욱 빠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뛰어다니며 일을 해도 피곤한 줄도 몰랐던 가장 순수한 시절이었다. 그런 내게 사람 간의 관계가 파탄 나 있던 기륭전자 노동자들이 단 십분 만에 서로를 이해하고 하나가 됐던 순간은 최고의 감동을 안겨주었다. 훗날 누군가를 사랑하게 된다고 해도 그때만큼 푹 빠질 수는 없을 것 같다. 그 기억으로 난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나 자신을 지탱해낸다. 

그리고 현재 내 옆을 함께하고 있는 생각만 해도 눈물 나는 9명의 동지들! 가장 힘든 이 시간을 함께 하고 있는 이들은 이 투쟁의 승패와 상관없이 꼭 누구보다 행복해져야 할 사람들이다. 반드시 그렇게 돼야 한다. 때로는 꿈을 꾼다. 한 번은 분회장님이 감옥에 있을 때 꿈을 꾸었는데, 그 꿈이 너무 생생해서 아직도 기억이 난다. 꿈속에서는 세월이 많이 지나 조합원들의 헤어스타일도 바뀌어있고 얼굴도 많이 변해있었는데. 

조합원들과 함께 총회를 하는 꿈이었다. 다시 조합원이 아주 많아져서 큰 강당을 가득 메우고 있었고 분회장님과 언니들은 모두 옆에서 환하게 웃고 있었다. 너무나 생생한 꿈이어서 분회장님에게 편지로 그 꿈 이야기를 적어 보냈는데, 며칠 되지 않아 분회장님이 보석으로 출소하게 되었고 그 편지를 읽어보지도 못하고 나오게 됐다. 우리의 기나긴 투쟁이 반드시 승리해서 단식 중인 언니들이 그 꿈처럼 다시 환한 웃음을 지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2005년 7월5일의 그 쉬는 시간 10분만큼의 감동과 환희를 다시 느낄 수 있는 시간이 내게 또 허락됐으면 좋겠다. 

 

 

  • 제작년도 :
  • 통권 : 제134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