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언] 이재유 선생의 삶과 사상 - 김경일

e노동사회

[제언] 이재유 선생의 삶과 사상 - 김경일

() 211 11.28 15:46

 

이재유 선생의 삶과 사상  



김경일(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한국의 근대에서 1920~30년대는 반세기 정도를 사이에 둔 1980~90년대와 비슷한 격동의 시기였다. 특히 1920년대 후반 1930년대 전반기에 국내에서는 1929년의 원산총파업이나 1930년의 평양고무공장 총파업에서 보듯이 일본의 식민 지배에 반대하고 식민지 민중의 해방을 지향하는 대중운동이 고조되어 갔으며, 곧이어 이는 진보적 지식인과 사회운동가들이 주도하는 비합법의 노동운동, 농민운동으로 이행하였다.


우리에게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한국 진보운동의 역사에서 이재유 선생은 이 시기, 특히 1930년대 민족혁명의 흐름을 주도한 대표 인물이다. 식민지 상태에서 조선의 독립과 민중해방 물결의 한가운데에서 그것을 주도함으로써 선생은 이 시기의 상징이 되었다. 


이재유를 호명하는 이유


이재유 선생에게 바쳐진 수많은 헌사 중에서 "당대 최고의 혁명가", 혹은 "30년대 좌익운동의 신화"라는 표현에서 보듯이 거듭되는 체포와 고문, 감옥생활, 탈주, 지하활동으로 점철된 선생의 삶은 남미의 혁명가로 널리 알려진 체 게바라 못지않게 극적이고 혁명적이었다.


우리는 역사에서 특정 인물을 기억하고 호명하는데 익숙하지 않은 삶을 살아왔다. 개항 이래 서구 문물의 수입과 적용을 통해 근대화를 추구해 오면서 우리 자신의 전통과 역사의 자산을 일구고 그로부터 배우는 데에는 소홀히 온 탓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이재유 선생을 역사에서 호명하여 불러내는 것은 단순히 선생을 추모하기 위한 것만은 아니다.


선생에 대한 호명과 추모는 민족의 독립과 해방된 사회를 위하여 불꽃처럼 살았으나 해방 이후 분단 80년을 눈앞에 둔 역사에서 망각의 강물 속으로 사라져 버린 집단기억의 상실을 치유하기 위함이다. 선생의 생애의 궤적과 경험을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현장에서 공유함으로써 그것을 끊임없이 되살려내고 실현해 나가기 위함이다. 


이처럼 단순한 기념과 추모를 넘어서서 그의 유산과 정신을 현재화하여 그와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 이재유 선생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선생의 삶이 우리에게 남긴 유산은 무엇인가? 생각나는 대로 거칠게 정리해 보면 다음의 세 가지를 들 수 있을 것이다.


민족문제와 계급주의


1920년대의 사회운동은 민족문제보다는 계급의 관점을 우위에 둔 것으로 평가된다. 이러한 편향은 특히 1920년대 후반 이후 민족개량주의가 급속하게 타락하는 것을 배경으로 더욱 강화되었다. 이 시기에 민족주의는 민족개량주의, 나아가 때로는 친일매판과 동일한 차원에서 공공연하게 인정되는 일정한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반대로 이 시기 세계혁명운동은 혁명역량의 결집에 부정적 영향을 미친 것으로 평가되는 '좌편향'의 커다란 흐름 안에 있었다. 식민지 조선에서 이러한 상황은 일제의 교묘한 분할통치 정책과 억압으로 더욱 복잡한 양상을 띠었다. 


이재유 선생은 이를 다음과 같이 분석한 바 있다. 1930년대 이후 치안유지법의 개정이나 경찰 테러의 강화에서 보듯이 노농대중의 생존 요구조차도 탄압한다면, 이들이 일정한 희생과 전투력을 가지고 반(半)공산주의자로 되고, 또 일정한 비합법의 활동 방법을 가지고 나올 수밖에 없으리라는 것이다. 다른 한편 이는 모든 중간계급의 운동을 몰락시킴에 따라 조선 내 정치 정세를 변화시켜 노동 자와 자본가 사이의 양대 계급 대립을 더욱 첨예화시킬 것이라고 보았다. 


민족사상으로서의 공산주의 


이상적인 민족주의자로 출발한 이관술이 "민족주의자들의 냉담, 비겁한 것과 일제와의 타협" 등을 보고 오직 공산주의만이 계급의 이익뿐만 아니라 민족해방에서 유일한 지침이요 정당한 노선이란 결론을 얻어 공산주의자가 되어버렸다고 술회한 사실은 이를 보인 것이다. 이 시기 사회주의/공산주의가 사회운동의 주도권을 장악한 현실의 기저에는 바로 일제의 민족 차별에 반대하는 민족 사상이 내재하고 있었다.


이재유 선생도 예외는 아니었다. 1920년대 중반 서울로 올라와 민족 차별을 경험하며 싹튼 선생의 민족의식은 이후 반제운동과 사회/노동운동에 헌신하는 사상의 토양이 되었다. 선생의 말을 빌자면 "처음에는 단지 민족의식에서 조선은 독립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는데 "형을 받고 나온 뒤에 공산주의자로 된 후 조선 독립과 공산 제도의 실현은 함께 되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즉 "조선 적화(赤化)의 수단으로서 조선 독립을 희망"한 것이 아니라 "우선 조선 독립이 근본 문제"라고 생각하여 그 실 현을 위하여 활동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이재유 선생은 이 시기의 주류 공산주의자들과는 달리 일본 제국주의의 민족 정책에 대하여 가장 강렬하게 비판하고 또 이에 항거함으로써 민족혁명에 대한 관점을 일관되게 유지하였다. 일본 제국주의가 조선 특유의 4천 년 역사와 문화, 혈통을 약탈할 뿐만 아니라 조선인의 언어, 풍속, 관습, 교육, 역사까지도 위조, 약탈, 동화되도록 강제하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선생은 학교 교육에서 조선어의 상용과 조선 역사 시간을 늘릴 것을 주장했다. 


최후로 검거된 이후 옥중 생활을 하면서도 선생은 조선어 사용금지를 반대하는 투쟁을 전개하다가 1944년 일제 감옥에서 옥사 하였다. 진보 운동 역사의 계승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일제의 가혹한 탄압과 추격, 고문, 학살의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지속해서 민족혁명을 실천해 나간 것이다.


민족혁명 관점의 계급주의 


공산주의 사회를 만드는데 왜 조선의 독립이 필요한가를 묻는 일본 검사의 질문에 대하여 선생이 "내가 조선 독립을 목적으로 함은 일본에서 독립하지 않는 이상은 언 제까지나 조선은 공산주의 국가로 될 수 없고 또 설령 공산주의 국가로 된다고 하여도 일본적 공산주의 국가로 되기 때문"이라고 당당히 소신을 밝히고 있다. 


이처럼 선생은 다른 사회운동자들과 달리 현실 민족주의의 무능력과 한계에 촉발되어 그것을 민족개량주의로 매도하면서 계급주의에만 매몰되지 않고 민족혁명의 관점을 일관되게 유지해왔다. 선생은 당대의 어느 운동가들보다 민족문제에 지대한 관심을 지니고 있 었으며 또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자신의 삶을 바쳤다. 이 시기 사회운동자들의 대부분이 계급문제를 중시하고 민족문제를 등한시한 사실에 비추어 보면 민족문제에 대한 이러한 인식은 당대 최고의 혁명가라는 명성에 걸맞은 것이었다.


사회운동의 토착화


이처럼 이재유 선생의 운동을 민족혁명의 시각에서 이해한다고 해서, 그것을 국내에 기반을 둔 이른바 국내파 운동만으로 인식할 수는 없다. 당시 이른바 국제선과의 연계를 지닌 운동에서 나타난 일정한 편향과 한계와 대한 비판에서 이재유 선생이 이들에 대해 일정한 거부감을 보인 것은 사실이다. 


예컨대 '코민테른 코스의 기치 아래'를 내걸고 국제선의 권위를 빌어 군림하려는 영웅주의와 권위주의를 선생은 비판하고자 했다. 당 재건운동 과정에서 나타난 국제노선에 대한 무비판과 맹목의 추종, 교조화되고 경직된 이론에 대한 고수, 주체적으로 운동방침을 세우지 못하고 외부의 권위에 의존하는 안이한 현실 인식, 대중 기반 없이 소수의 운동자로 조직을 결성해서 일거에 혁명을 달성하려는 관념과 급진의 태도 등을 선생은 거부하고자 했다.


이재유 선생은 조선의 현실에 대한 주체적이고 구체적인 운동방침을 신뢰했고, 이것이 선생이 말하는 진정한 의미에서 올바른 국제노선이었다. '국제선의 권위'를 내세운 운동자를 선생이 신임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이러한 이유에서였다. 


균형잡힌 국제주의 


국제주의와 국제연대에 대한 선생의 감수성은 일찍이 1920년대 일본에서의 활동을 통해서 계기를 얻었다. 1920년대 중반 이후 선생은 일본에서 교육받았으며,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 재동경조선청년총동맹, 신간회 동경지회 등의 사상단체와 노동단체 등에서의 합법 운동과 아울러 조선공산당 일본총국과 고려공산청년회 일본총국 등에서 비합법 운동을 하면서 도쿄경시청을 비롯한 경찰서에 무려 70여 차례나 검속될 정도로 맹렬한 활동을 했다. 


1930년 제4차 공산당 사건의 관계자로 조선으로 호송되어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3년 6개월의 형을 선고받은 선생은 1932년 말에 출옥한 이후 이듬해인 1933년에는 서울에서 경성제국대학의 미야께 시카노스께(三宅鹿之助) 교수와 제휴하여 일본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운동을 전개했다. 


코민테른에서 발표한 일본공산당의 1932년 테제를 원용한다거나 1930년대 후반 조직 기관지로 일본, 독일 공산당 기관지의 명칭과 같은 적기(赤旗)를 발행한 사실 등에서 보듯이 1936년 말 일제에 의해 체포된 이후 옥중에서 죽을 때까지 선생은 국제노선에 대한 감각과 지향을 잃지 않았다.


‘국내파’와 ‘파벌’이라는 비난 


이러한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이재유 선생은 운동의 토착화와 국제주의를 균형있게 추구한 운동자였다. 선생은 국제기관과 연락이 있다고 해서 대중 앞에 군림하여 대중을 획득하려는 활동을 하지 않는 것과, 이와 정반대로 대중을 많이 획득했다고 해서 국제 연계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당을 건설하려는 각각의 경향을 비판하면서 전자에 대해서는 혁명 투쟁을 통한 오류의 청산을, 후자에 대해서는 국제노선의 계통 지도를 통한 투쟁의 전개를 권유했다. 


이러한 주장에도 불구하고 선생은 국제선의 권위를 부정한 '국내파'로 매도당하기도 했고, 국제기관에서 파견된 운동자들은 종종 선생의 운동을 '파벌'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보고자 했다. 국내주의와 국제주의 사이에 이러한 대립 관계가 조성되어 운동의 토착화가 정착하지 못한 것은 당시의 사회 운동에서 커다란 손실이자 불행이었다.


대중의 자율성과 주체성


이재유 선생이 사회/노동운동의 토착화를 지향한 사상의 기저에는 대중의 자율성과 주체성에 대한 깊은 신뢰가 있었다. 당시의 현실에서 보면 이는 이른바 전위와 대중의 문제와 연관된다. 미약한 사회운동의 전통을 배경으로 다수 대중이 외부의 권위에 의존한 현실에서 대부분의 사회/노동운동가들 역시 완전히 벗어나 있지 않았다. 


수백 년에 걸친 유교 전통의 영향으로 노동에 대한 일정한 편견과 아울러 노동자에 대한 사회의 거리감 또한 점차 극복되고는 있었다하더라도 엄연히 존재했다. 노동자 출신이 소수이고 지식인 학생들이 다수를 차지한 이 시기의 사회/노동운동가나 사상가조차 노동운동에 대한 대의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편견의 일정한 영향권 안에 있었다.


1930년대 전반의 무수한 당재건 운동의 사례들은 대중의 기초도 없이 전국조직을 가지고 당을 먼저 결성한 다음 노동자들을 단순히 '획득'하는 대상으로만 여긴 운동자들의 행태를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인다. 


노동대중 앞에 군림하면서 이들을 지도하려는 운동자들의 일방통행식 자세는 1933년 9월 동대문 밖의 서울고무에서 발생한 노동자 파업에서 엿볼 수 있다. 이 파업은 대중파업에서 전위의 역할과 임무, 즉 노동대중에 대한 전위의 역할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당시의 노동자들이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지를 잘 보이는 대표 사례로 주목할 만하다. 


‘지도’와 ‘응원’의 문제 


한편에서 이른바 국제선으로 통칭하는 프로핀테른에 속한 '정통 운동선'의 노동운동가들은 이 파업에 자신들이 '파견'된 이유를 노동자에 대한 '지도'에서 찾았다. 이와는 달리 이재유 선생의 조직에 속한 운동자들은 지도가 아닌 '응원'으로 자신들의 역할을 규정하고자 했다. 파업에 참여한 노동자들이 열띤 토론 끝에 협의한 결과는 '응원'이라는 이재유 그룹의 주장을 지지하는 것으로 결말이 났다. 


노동운동가들이 파업에 대하여 응원의 차원에서 개입한다면 파업에서 노동자의 적극성과 주도권이 부각되는 것이고, 이는 노동대중의 자율성과 주체성의 배양으로 이어진다. 반면 노동운동가가 파업을 지도하게 되면 노동대중은 단순히 그 지도를 따르는 수동의 동원 대상에 불과하게 된다.


이재유 선생은 이러한 행태에 대한 비판에서 노동운동을 시작했다. 1932년 말에 출옥하여 운동을 시작할 무렵 그는 만나는 사람마다 자신이 직접 노동자가 되어 공장으로 들어가서 활동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전위로서 노동운동가는 자신이 직접 노동자로 되어 노동대중 속에 파고 들어가 대중기반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 


민주집중제


이를 통해서 전위와 대중이 쉽게 분리되어 온 지금까지의 폐단을 극복하고 대중기반의 당을 결성할 수 있다고 선생은 생각했다. 대중이 없는 당은 죽은 당이므로 각각의 운동자는 공장과 작업장에 들어가 자유롭게 노동자에 함께 해야 한다는 것이 선생의 일관된 운동방침이었다.


선생이 독자로 고안해낸 ‘트로이카’ 조직방식은 이 대목에서 언급할 수 있겠다. 각각의 운동자가 자기의 자유의사에 따라 개인 차원에서 접촉하여 상당한 그룹이 결성될 때 비로소 조직을 한다. 이 이론은 당시 지배하던 이른바 오르그에 의한 중앙집중의 하향식 조직방식과 대조를 이룬다. 레닌의 이른바 민주집중제가 이후 '민주' 요소는 무시된 채 '집중' 요소만 관철된 상태에서 스탈린 체제로 이행해 간 역사도 이와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재유 선생의 트로이카 이론은 이러한 일방의 지도-피지도 관계를 부정하고 "지도함과 동시에 자신도 지도되는" '민주'의 요소를 지니고 있었다. 트로이카 조직에서 민주성을 담보하는 평등의 원리는 이중의 차원에서 관철된다. 


‘트로이카’ 조직방식


첫째 그것은 운동자들 사이의 관계를 기본으로 상호대등한 트로이카로 설정한다. 이처럼 평등한 관계에 있는 운동자들은 노동대중 속에 들어가 활동하는데, 이때 양자의 관계 역시 대등하다. 이에 따라 대중이 전위가 되고 전위가 대중으로 되는 것이다. 노동자들의 의식화를 통하여 전위 스스로 의식이 고양되며, 전위는 일방으로 지도하는데 그치지 않고 스스로가 대중으로부터 '지도'를 받는 것이다.


이처럼 이재유 선생은 노동대중의 지도력을 인정했으며 그들이 지닌 민중적 자율성과 역동성을 강조했다. "위대한 사람 한 사람이 통일한다 해서 혁명은 성취되는 것이 아니다"는 말에서 단적으로 드러나듯이 선생은 노동대중의 주체성과 자발성을 다른 누구보다도 중시했다. 그리고 노동대중에 대한 이러한 신뢰는 민중에 대한 선생의 깊은 애정에서 나온 것이었다. 


선생이 추구한 노동운동의 기저에는 노동자, 농민과 도시빈민, 창녀에 이르기까지 하층 민중에 대한 지향이 있었다. 일제 강점기에서 하층 민중의 대다수는 조선인이라는 점에서 이재유 선생은 민족적이었던 것만큼이나 민중적이었다.


여성노동자들의 고통 


이재유 선생은 일본에 있을 때 조선인 여성을 마굴(사창가-필자)에서 구조한 경험을 이야기한 바 있다. 서울에 와서도 선생은 부모를 살릴 작정으로 몇년이고 자기 몸을 팔아야 하는 어린 여성들의 고통을 잊지 않았다. 


실로 어린 그녀들의 고기를 베어 내서 파는 것과 같은 비참한 상태를 고발하면서 선생은 이러한 공공연한 인신매매는 경찰에서 조장할 뿐만 아니라 한 사람 매매하는 데 얼마씩의 세금을 빼앗고 있다고 통렬히 비난하였다. 


선생은 군시제사나 종연방적, 편창제사 등의 대공장에서 일하는 여성 노동자들 역시 이러한 인신매매의 야만 상태에 처해 있다고 보았다. 단돈 10여 원에 팔려 온 이들은 6년, 10년의 계약으로 한번 들어가면 절대 나올 수 없다고 하면서 선생은 감옥보다도 못한 위생 상태에 놓인 이들 여성 노동자가 감내해야 했던 감독, 구타, 고문, 징벌 등에 깊은 공감을 표명하였다. 


선생이 알고 지내던 여성 노동자 8명 중에서 지금은 단지 2명밖에 남아 있지 않고 나머지 6명은 모두 죽었다고 하면서, "내가 일찍이 죽어야 할 사람만을 알았던가?"라고 개탄하고 있 다. 


농민의 비참한 생활상태


나아가서 이재유 선생은 양주군에서 농민의 생활상태를 직접 조사하기도 했다. 여기에서 선생은 "삶에 대한 애착을 포기"하고 자신의 운명이 "언제 어떻게 될지를 모"르는 농민의 비참한 생활상태만을 강조하지 않았다. 


아무런 수익도 없이 부채 등에 눌려 생산 활동을 계속해야 하는 어쩔 수 없는 자신의 현실을 충분히 인식하는 농민의 '현명함'에서 선생은 민중으로서의 생명력과 하층계급에 고유한 활력에 주목하고자 했다.


이재유 선생이 우리에게 남긴 이러한 유산들은 일종의 역사 자산으로서 간직하고 발전시켜 나가야 할 것이지만, 선생 개인 차원에서 보더라도 본받을만한 미덕을 남기고 있다. 여러 자료를 종합해 볼 때 이재유 선생은 대범하면서도 다정다감하고 낙천적이면서도 의지가 굳은 성격이었다. 


“매력있는 특이한 성격”의 소유자


선생이 남긴 몇몇 글들을 살펴보면 선생은 모든 사물을 근본의 차원에서 생각한 사람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선생과 함께 활동한 운동자들이나 그의 '적'에 해당하는 일제 경찰은 한결같이 공동으로 이를 지적한다.


예컨대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경성일보는 선생의 체포 사실이 보도통제에서 해금되자마자 발행한 호외에서 "선이 굵은 성격과 동지 획득에서 이론 외골수로만 치닫지 않고 쉽게 일반화한 이론"과 아울러 "매력있는 많은 특이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하면서, "실천의 교묘함에서는 다른 어떤 지도자도 그의 발아래(足下)에도 미치지 못한다"거나 평가했다.


해방 이후인 1946년 4월 발간한 신천지에서는 "그는 정이 있고 눈물이 있고 굳센 실천력과 많은 감화력을 가진 지도자"였으며, "그가 한번 움직이매 수많은 청년이 그와 생사를 같이 할 것을 맹세하였고 그의 신변이 위험하게 되매 죽음으로써 그를 지킨 청년이 많음을 생각할 때 그가 혁명적인 지도자로서 청년들에게 얼마나 신망이 두터웠는가를 알 수가 있"다고 언급하면서 "중일사변 이후 최대의 혁명가"로 평가 하고 있다.


혁명적, 민족적, 민중적


그러나 이재유 선생이 활동한 범위와 성격이 여전히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는 사실은 오늘날 선생에 관한 정확한 평가를 주저하게 한다. 이와는 달리 한편에서는 선생의 운동이 실제보다 과장되어 전해지거나 혹은 신화화되어 받아들여지는 경향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러한 극단의 편향은 그의 삶과 실천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방해했으며 역사를 통해 배운다는 태도에 커다란 장애가 되어왔다. 그러나 이러한 유보에도 불구하고 이재유 선생에 관하여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선생이 "혁명을 위해 살고, 혁명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고, 또 혁명을 위해 기꺼이 죽었"다는 사실일 것이다. 선생은 혁명적이었던 것만큼이나 민족적이었으며, 민족적이었던 것만큼이나 민중적인 삶을 살았다.


'조선의 절대 독립과 공산주의 사회의 건설' 


마지막으로 이재유 선생이 노동운동을 통해서 궁극에서 무엇을 지향했는지에 대한 질문이 남아 있다. 말할 것도 없이 그것은 이 시기 많은 '사상범'과 운동가들을 얽어맨 사상사건 판결문에 상투로 등장하는 '조선의 절대 독립과 공산주의 사회의 건설' 이었을 것이다. 


1930년대 후반 선생은 자신이 바라는 바람직한 미래 사회의 이미지에 대해 상술한 바 있다. 차디찬 감방 안에서 선생은 "사회적 생산력이 고도화되어 높은 수준의 물질적 생활을 영위하며 지배와 억압의 관계가 없고 국가권력이 사회구성원의 자유의지에 의한 정치적 위원회에 대체되고 가장 고급스런 예술적 생활을 자유롭게 선택하여 즐기며 남녀의 사랑이 끊이지 않고 현재 우리의 사색으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진실한 일부일처제의 엄격함이 있는" 그러한 사회에의 이상을 가슴에 품고서 파쇼권력의 야만적이고 비인간적인 고문과 가혹한 인격적 모멸이나 학대를 온몸으로 견뎌냈다.


'노쇠한 흡혈귀 같은 자본주의', 그것도 "기형적인 경제적, 정치적 조건들"이 모든 사회관계에 관철되는 식민지 조선에서 마치 마르크스가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묘사한 목가적이고 낭만적인 사회를 연상하게 하는 이상사회의 비전을 제시하는 것 자체가 비현실에 가까울지 모른다. 


이 시기에 비롯되어 전후 냉전시대의 각인을 받고, 이후 역대 군사정권의 악의적이고 집중적인 세뇌를 거친 반공 이데올로기를 통해 형성된 이념 지형은 이재유 선생이 제시한 이상사회에 대한 이해를 가로막고 있다.


이재유의 정신을 되살리자


이재유 선생을 추모하고 기억하기 위한 기념사업회가 출범하는 오늘 우리는 선생의 생애를 통해서 구현된 선생의 사상과 실천, 그리고 선생이 바라던 이상사회의 정신을 오늘의 한국 사회 현실에서 기억하고 되살려내야 하는 엄중한 채무 의식과 책임감이라는 역사의 무게를 느낀다. 


불평등과 차별을 예로 들더라도 소득과 자산, 소비를 비롯하여 교육과 보건, 팬데믹과 기후 위기 등 일상의 미시영역으로 침투하는 양상과 더불어 글로벌한 거시 차원에서 전방위로 확대되어 가는 복합성을 보이는 당면 현실에서 선생이라면 어떻게 이에 대응하여 행동했을지를 사유하고 실천하는 것이야말로 단순한 추모와 기념을 넘어서서 오늘의 현실에서 선생의 정신을 되살려서 그것을 이어가는 길이 될 것이다.


* 이 글은 2023년 4월 30일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과 의정원홀에서 열린 ‘항일혁명가·노동운동가 이재유선생기념사업회 출범식’의 강연발표문이다.  


출처: <e노동사회> 2024년 11월호

, , , , ,